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신이 내려준 재능 Adami Corradetti (아다미 코라데티)

정준극 2008. 2. 26. 15:58
 

▒ 신이 내려준 재능 Adami Corradetti (아다미 코라데티)

    이리스 아다미 코라데티


아다미 코라데티는 제자들에게 나비부인을 가르치면서 “나비부인의 제1막은 대단히 감미롭게 불러야 한다. 보체 인판틸레(Voce infantile: 어린 소녀와 같은 음성. 순진함과 순결함을 함축한 음성)로 부르면 안된다. 나비부인은 결혼을 위해 자기의 가문을 거부하고 종교를 바꾸었다. 이것은 성숙한 여인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초초상을 어린 소녀로만 보면 안된다.”라고 했다. 이렇듯 그의 오페라 역할 해석은 철저하고 분위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아다미 코라데티는 1903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훼루치오 코라데티(Ferruccio Corradetti)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바리톤 겸 배우 겸 평론가였다. 어머니인 비체 아다미(Bice Adami)는 유명한 소프라노였다. 아다미의 어머니는 마스카니의 Le maschere(가면)의 주인공에 대한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한 소프라노였다. 두 사람은 여러 장의 레코드 취입을 함께하여 남겨 놓았다. 어머니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따서 아다미 코라데티라고 불린 그의 원래 이름은 이리스(Iris)였다. 그래서 지금도 음악 서적에는 그의 이름이 이리스 아다미 코라데티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스카니가 어머니에게 이리스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추천해 주었다는 후문이 있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중에 '이리스'라는 것이 있음은 흥미 있는 일이다.

 

 


코라데티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어느날 토스카니니도 참석한 파티에서 코라데티는 피아노 연주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기회가 있었다. 토스카니니는 당장 코라데티에게 라 스칼라와 계약토록 했다. 코라데티는 1927년 라 스칼라에서  볼프-페라리의 슬라이(Sly)의 주역을 맡아 오페라무대에 데뷔하였다. 그후 몇 년동안 코라데티는 주로 콤프리마리오(제2주역)로서 활동하였다. 코라데티는 토스카니니, 마스카니, 찬도나이 등 당대의 이름난 작곡가-지휘자들의 지휘아래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코라데티는 고전의 카리씨미(Carissimi)로부터 현대적인 메노티(Menotti)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여 오페라의 역할을 맡아하였다. 코라데티가 초연의 주역을 맡은 것만 해도 35개가 넘는다. 코라데티의 대표적인 역할은 찬도나이의 ‘리미니의 프란체스카’(Francesca di Rimini)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수많은 역할 중에서 나비부인은 그의 등록상표였다. 코라데티는 1938년부터 몇 년동안 라 스칼라에서 나비부인을 독점하여 공연하였다. 1946년, 전쟁이 끝난 직후 코라데티는 결혼하였다. 그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가정을 보살피기 위해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나중에 그는 이 결정을 후회하였다.


코라데티실은 어릴때부터 오페라를 싫어하며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이면 날마다 오페라와 씨름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였다. 더구나 같은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부부가 되면 남들이 보기에는 ‘아이고, 이해심이 많겠네요!’라고 할지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는 대단한 의견차이가 있게 마련이며 이로써 언쟁등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어린 이리스 아다미 코라데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아무튼 어린 코라데티는 성악을 부모에게서 코치 받지 않고 발성에서부터 프레이싱, 딕션, 역할 해석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터득하고 완성하였다. 그는 아리아를 부를때 레가토를 우아하게 만들어 내는 재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우아한 레가토를 무척 좋아하였다. 어떤 평론가는 그러한 코라데티에 대하여 ‘코라데티는 베리스모와 결혼하였다. 그의 레가토를 들어보면 알수있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코라데티는 역할 해석을 할 때에 머리(지식)와 가슴(정신)이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고 말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그의 음성은 보다 부드럽고 연약한듯하며 파토스(Pathos)적인 것으로 변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개성적인 음성이 최고로 대우를 받았다. 소리가 밝고 멀리 뻗어 나가면 박수를 받았다. 드라마틱하고 성량이 풍부한 것이 제일로 여기던 때였다. 그러므로 코라데티의 경우처럼 부드럽고 연약하며 정신적인 애정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표현하는 것은 별로 환경을 받지 못했다. 당시 비안카 스키치아티(Bianca Scacciati), 또는 아델라이데 사라세니(Adelaide Saraceni)가 코라데티보다 더 둥글고 침투하는 소리를 냈지만 코라데티가 더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반면 영국, 독일, 미국에서는 원숙하고 감미로운 음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1954-57년간 코라데티가 취입한 음반을 들어보면 코라데티의 음성이 미국이나 영국 스타일처럼 상당히 원숙하고 감미로우며 어두우면서도 둥근 것을 알수있다.


코라데티는 어떤 경우, 노래 부를때 반음 정도 약간 높은 샤프로 불렀다. 그렇게 부르면 아리아가 보다 드라마틱해져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코라데티는 미세한 불협화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야 의사전달이 효과적으로 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샤프로 노래부르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어떤 음은 원래보다 늘리고 어떤 음은 원래보다 짧게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그건 단순히 본능과 직관일뿐 어떤 이유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디바들은 오페라 무대에서 방향 전환을 하여 영화에 출연하거나 또는 은퇴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코라데티도 은퇴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카티아 리키아렐리, 마르게리타 리날디, 발렌티니 테라니(Valentini Terrani), 마라 잠피에리(Mara Zampieri), 다이아나 화니찌(Diana Fanizzi) 등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그는 1998년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노래를 더 부르고 더 베풀고 싶었다. 나의 영혼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이었다. 오늘날 아다미 코라데티 음악경연대회는 유능한 성악가를 발굴하는 위대한 국제무대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