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사랑의 디바 Beverly Sills (비벌리 실스)

정준극 2008. 2. 26. 17:07
 

▒ 사랑의 디바 Beverly Sills (비벌리 실스)

 

 


미모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비벌리 실스는 아마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오페라 아티스트일 것이다. 실스는 메트로의 무대에서 은퇴한 후에도 뉴욕시립오페라단의 총감독으로 활동하는등 여러모로 음악계를 위해 봉사하였다. 실스는 30여년간 미국은 물론 세계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소프라노이다. 그는 특히 무대 매너가 뛰어나 어느 공연에서나 놀랄만한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실스가 무대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그 오페라는 성공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한 실스에게는 남다른 활동이 있다. 선천적 기형아를 돕기 위한 전미국 어머니들의 모임을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재 이 단체의 전국회장이다. 실스는 지난 10년간 선천적 기형아(언청이등) 돕기를 위해 7천만불의 기금을 조성했다. 놀라운 업적이었다. 실스는 그 바쁜 음악계 일정에도 불구하고 선천적 기형아들의 부모들을 면담하고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실스가 이러한 일에 헌신하게된 이유는 그의 두 아들 머피와 피터 때문이다. 머피는 두 살때에 청각장애 증상을 보여 계속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다. 피터는 한 살밖에 되지 않은 때에 정박아로 판정을 받았다. 이같은 고통스런 사실을 알게된후 실스는 아이들을 위해 이윽고 무대를 떠난다. 세계적 소프라노가 모든 재능과 인기와 명예와 영광을 뒤로하고 바닥으로 내려와 불우한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은 마치 천사를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일이었다.


비벌리 실스는 1929년 5월 25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루마니아 유태인 계통의 이민 1세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벨르 미리암 실버맨’(Belle Miriam Silverman)이었다. 비벌리 실스는 예명이다. 실스는 어릴때부터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말하며 자랐다. 실스는 어릴때부터 매우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였다. 세 살때에는 ‘미쓰 예쁜 아이’(Miss Beautiful Baby) 경연대회에 나가서 ‘잭과 질의 결혼’(The Wedding of Jack and Jill)이라는 노래를 불러 우승을 차지하였다. 실스의 어머니는 어린 실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확신하고 무용, 성악, 웅변을 과외시켰다. 대단한 어머니였다. 그런 연유로 실스는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라디오 방송국의 어린이 프로그램 사회자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Uncle Sol Solves It(솔 삼촌은 해결사)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실스는 일곱 살때부터 유명한 성악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곧이어 CBS 라디오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매주 일요일 전국으로 방송되는 ’보위소령의 아마추어 시간‘에 출연함으로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45년, 실스가 17세때에 그는 길버트-설리반 공연단에 들어가 전문적인 무대 데뷔를 했다. 실스는 길버트-설리반의 뮤지컬 오페레타뿐만 아니라 다른 오페레타에도 출연하여 오페라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실스의 첫 오페라 출연은 그가 19세 때인 1947년 카르멘에서 프라스퀴타(Fransquita)역을 맡은 것이었다. 필라델피아 시민회관에서의 공연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후 실스는 샌 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공연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에서 주역인 트로이의 헬렌을 맡아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1955년에는 뉴욕시티오페라에서 ‘박쥐’의 로잘린데를 맡아 도하 신문으로부터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실스를 오페라 성악가로 확고하게 만들어준 것은 더글라스 무어의 ‘베이비 도의 발라드’(The Ballad of Baby Doe) 세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인 베이비 도의 역을 맡고서부터였다.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킨 공연이었다. 1956년, 실스가 27세 때에 그는 클리블랜드의 The Plain Dealer라는 신문의 발행인인 피터 그리나흐(Peter Greenough)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둘을 두었지만 앞서도 설명한대로 큰 아이는 청각장애자였고 작은 아이는 정신박약아였다. 실스는 두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당분가 무대를 떠났다.


그로부터 약 5년후인 1964년 실스는 오페라단들의 열화와 같은 간청에 못이겨 무대로 돌아왔다. 첫 번 맡은 역은 보스턴에서 공연된 ‘마적’의 밤의 여왕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실스만큼 고도의 테크닉과 성량, 그리고 재능으로 밤의 여왕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실스를 따라올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대단한 콜로라투라에게 한없는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실스는 실상 밤의 여왕 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주역이 아니어서였다. 1966년 뉴욕시티오페라는 헨델의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 ‘줄리오 세자레’(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기로 하고 실스를 초청하였다. 실스는 클레오파트라역을 맡았다. 실스를 국제적 디바로 만들어준 공연이었다. 이어서 실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금 수탉’에서 셰마카 여왕 역할을 맡아 신비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마스네의 마농에서는 요염한 분위기를 표현하였으며 도니제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는 비극적인 광란의 장면을 완벽하게 소화하였다. 또한 라크메에서 부른 Bell Song은 아직까지 실스보다 뛰어나게 부른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실스는 푸치니의 3연작인 수녀 안젤리카, 외투, 제비에서 안젤리카, 죠르제타, 로레타의 역할을 훌륭하게 공연하여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1969년 실스는 드디어 라 스칼라에 진출하여 로시니의 ‘고린도 점령’에서 파미라(Pamira)역을 맡아 밀라노를 압도하였다. 몇 년후 메트로에서 ‘고린도 점령’이 미국 초연되었을 때 실스는 18분간에 걸친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무어라고해도 실스의 진면목을 보여준 참다운 역할은 루치아였다.


과거 반세기 동안 대부분의 세계적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은 루치아라고 하는 스펙터클한 역할을 거쳐서 디바의 반열에 올랐다. 루치아는 하나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에게 있어서 가장 최후의 등용문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스의 경우에는 달랐다. 실스는 60여 역할을 맡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라모의 ‘이폴리테와 아리시’(Hyppolyte et Arcie)로부터 ‘호프만의 이야기’의 주인공 세 역할, 노노(Nono)의  인톨레란자(Intolleranza)에 이르기까기 어렵다는 역할은 모두 정복하였고 특히 헨델의 줄리어스 시저에서 클레오파트라, 로시니의 ‘고린토의 점령’에서 파미라(Pamira), 마스네의 마농,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금닭에서 셰마카(Shemahka)여왕,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피’에서 콘스탄체,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서 체르비네타 등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고난도의 역할을 모두 섭렵한후 마지막으로 루치아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스의 루치아는 수십년에 걸친 그의 오페라 생활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1969년 10월 9일 뉴욕시티오페라에서의 루치아는 실스를 전설적 인물로 만들어 준것이었으며 그때까지 실스보다 더 완벽한 루치아는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 실스가 루치아에서 광란의 장면을 마치고 나자 관중들은 모두 기립하여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뉴욕 타임스는 ‘실스만이 창조할수 있는 광란의 장면이었다. 더 이상 다른 오페라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라고 썼다. 타임지는 ‘모든 액션 하나하나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음성 하나하나가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후 세계의 유명 오페라 극장들은 루치아를 위해 앞을 다투어 실스를 초청하였다. 


실스는 기본적으로 드라마틱 콜로라투라에 속한다. 그러나 연륜의 증가와 함께 스핀토로 옮겨지는 것을 알수있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가벼운 역을 맡아하였으나 무거운 역할도 맡아할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마리아 스투아르다(도니제티)의 타이틀 롤, 로베르토 드브로의 엘라자베타도 훌륭하게 맡아 하였다. 실제로 사람들은 실스가 피아니시모와 같은 가벼운 소리를 초월하여 드라마틱한 소리를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찬사를 보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고통도 있었을 것이다. 실스는 후에 ‘로베르토 드브로’ 때문에 4년의 경력이 단축되었다고 말한바 있다. 1980년 무대에서 은퇴한 실스는 그로부터 1991년까지 뉴욕시립오페라단의 총감독을 맡아하여 빈약한 재정을 튼튼히 함으로서 오페라단의 자립운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링컨 센터의 의장을 맡아했다. 메트로에서 은퇴한 실스는 2002년 메트로에 다시 돌아와 메트로 의장을 2005년까지 3년동안 맡았다. 실스는 가정 사정 때문에 의장직을 내놓는다고 말했다. 실스는 8년전부터 병중에 있는 남편을 돌보아 왔다. 이제는 양로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비벌리 실스는 오페라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시기에 18편의 오페라를 전곡 취입한바 있다. 대단한 업적이었다. 실스는 PBS 방송에서 기획한 오페라 감상 시간을 위해 80회나 제작에 참여하거나 직접 출연하였다. 실스가 캐롤 버네트와 함께 출연한 ‘메트에서의 실스와 버네트’(Sills and Burnett at the Met)라는 프로그램은 대단한 인기를 끈 것이었다. 실스가 해설을 맡은 ‘음악의 프로필’(Profile in Music)은 에미상을 받은 프로였다. 실스는 1976년 ‘버블스: 자화상’(Bubbles: A Self-Portrait)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발간했다. 이어 1987년에는 자서전을 완성했다. 비벌리 실스는 2007년 7월 2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실스는 성악가로서는 최초로 뉴스위크(Newsweek)지와 타임(TIME)지의 표지인물로 등장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