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질의 국보 Bidu Sayão (비두 사야오)
비두 사야오는 브라질의 국보적 오페라 아티스트이다. 그는 브라질의 자랑이며 영광이다. 비두 사야오는 1902년 리우 데 자네이로의 교외인 보타파고(Botafago)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발두이나 데 올리베이라 사야오(Balduina de Oliveira Sayão)였다. 아버지는 비록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지성적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한 억척여인이었다. 아버지는 비두 사야오가 다섯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부터 어머니는 비두 사야오를 좋은 선생님 밑에서 성악 공부할수 있도록 무던히도 자기를 희생하며 딸에게 헌신하였다. 어머니의 간절한 지원으로 사야오는 18세에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오페라에 처음으로 데뷔했다. 브라질의 음악계는 이 젊은 소프라노가 장차 세계적인 엄청난 성악가가 될것으로 예견하였다. 어머니는 사야오를 유럽에서 공부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사야오는 루마니아와 프랑스에서 재능을 연마하게 되었다. 프랑스 니스에서는 유명한 폴란드 출신의 테너 장 드 레츠케(Jean de Reszke)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마농
1920대와 1930년대에 사야오는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는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성장하여 로마, 파리, 그리고 고국인 브라질의 오페라 무대를 장식하였다. 로마의 콘스탄치극장에서 공연할때에 사야오는 오페라 제작자 월터 모키(Walter Mocchi)를 만났다. 1928년 월터 모키의 부인인 소프라노 엠마 카렐리(Emma Carelli)가 세상을 떠나자 모키와 사야오는 비록 모키가 사야오보다 30여년 연상이었지만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라는 전제아래 로맨틱한 관계에 빠지게 되었고 이어서 결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7년후 사야오는 19세 연상인 이탈리아의 바리톤 주세페 다니세(Giuseppe Danise)와 새롭게 결혼하였다. 사야오의 미국 첫 데뷔는 1936년 이었다.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드빗시의 가곡을 연주했다. 이 리사이틀의 협연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토스카니니는 사야오의 음악적 매력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로 토스카니니는 사야오의 후원자가 되어 평생을 우정을 다지며 지내게 되었다. 카네기에서의 리사이틀이 성공을 거두자 사야오는 이듬해에 메트로에 진출하였다. 실은 스페인 출신 소프라노인 루크레지아 보리(Lucrezia Bori)가 사정상 공연하기 어렵게 되자 대신 픽업된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평론들은 사야오의 공연에 한없는 찬사를 보냈다. 얼마후 사야오는 메트로에서 비올레타와 미미를 맡았다.
줄리에타
사야오는 고국 브라질에서 공연을 가지라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리우 데 자네이로에 돌아와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하였다. 사야오는 브라질의 국민적 영웅으로서 대단한 환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극장에서 관객들은 별다를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야유를 보내기까지 했다. 실망한 사야오는 며칠후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채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 1938년 사야오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사야오의 노래에 깊이 감동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야오에게 원한다면 미국 시민권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오는 이를 거절하고 평생 브라질 시민으로 남아있겠다고 말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브라질 국민들은 그때서야 ‘사야오!’를 외치며 존경을 보냈다. 사야오는 브라질의 위대한 작곡가인 빌라 로보스(Villa Lobos)와 오래 동안 예술적 파트너로서 지냈다. 빌라 로보스는 사야오를 위해 작곡을 하였고 사야오는 빌라 로보스의 작품을 연주하고 레코드로 취입하였다.
질다(리골레토)
15년간 메트로에서 활동했던 사야오는 1952년, 그가 50세 때에 은퇴 공연을 가졌다. 아직 정상일때에 은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사야오와 남편 쥬세페 다니세는 메인주 링컨빌의 해변에 집을 마련하고 조용한 생활로 돌아갔다. 미국의 각 오페라 극장들은 사야오에게 출연을 계속 제안하였지만 사야오는 젊은 음악도를 위한 공개강좌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절하였다. 196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후 사야오는 지금까지 메인의 집에서 조용한 보내고 있다. 1995년 사야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90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조국 브라질을 방문하였다. 브라질은 사야오를 따뜻하게 영접하였다. 브라질에서 돌아온지 며칠후 그는 메인주의 라크포드에 있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화장으로 치루었고 재는 그가 살던 집 앞의 바다에 뿌려졌다. 비두 사야오의 커다란 초상화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로비에 걸려있다. 2000년, 브라질 정부는 사야오를 기념하여 ‘비두 사야오 국제 성악 경연대회’를 조직하였다. 브라질의 오페라 수준을 높이기로 한 결정중의 하나였다.
'디바·디보의 세계 > 세계의 소프라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과 같은 인생 Blanche Arral (블랑셰 아랄) (0) | 2008.02.26 |
---|---|
바그너 신화의 창조자 Birgit Nilsson (비르기트 닐쓴) (0) | 2008.02.26 |
사랑의 디바 Beverly Sills (비벌리 실스) (0) | 2008.02.26 |
프라하의 꽃 Bertha Förster-Lauterer (베르타 회르스터-라우테러 (0) | 2008.02.26 |
주역보다 중요한 조역 Bernice de Pasquali (버니스 드 파스쿠알리) (0) | 2008.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