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의 음성 Dorothy Maynor (도로시 메이노)
뛰어난 성악가이며 음악 교육자였던 도로시 메이노는 1910년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의 기독교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40년대와 50년대에 대단한 찬사를 받았던 흑인 소프라노였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인 니콜라스 슬로님스키는 도로시 메이노에 대하여 ‘높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종소리와 같은 음성을 지닌 소프라노로서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지녔으며 진실함과 열정으로 감동을 준 아티스트였다’고 말했다. 어릴때부터 아버지의 교회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했던 도로시는 햄프톤 대학을 거쳐 뉴저지의 프린스톤의 웨스트민스터 합창대학을 나왔다. 그가 음악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것은 햄프톤 대학 합창단의 솔리스트로 유럽 순회 연주회에 참여한 것이었다.
1939년 탱글우드의 버크셔 페스티벌에서 거장 세르게 쿠쎄비츠키의 지휘로 독창을 한것은 그의 음악 경력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 준것이었다. 쿠쎄비츠키는 도로시를 ‘기적의 음성을 가진 소프라노’라고 선언하고 ‘온 세계는 그의 노래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도로시는 쿠씨베츠키의 지원으로 뉴욕에 데뷔하여 뉴욕 타임스로부터 격찬을 받았으며 마리안 앤더슨과 함께 당대 흑인 성악가중의 최고라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도로시의 리릭 콜로라투라 아리아는 참으로 뛰어난 것이었다.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샤펜티어의 루이제에서 Depuis le jour였다. 메트로의 루이제 공연에서 도로시가 기록적인 장시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두고두고 얘기되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콘서트에서도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어 각처에서 초청이 쇄도하였으며 당시 미국 성악가 중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 사람중의 하나였고 그의 음반은 베스트 셀러였다.
1942년 도로시 메이노는 할렘의 성 제임스 장로교회 목사인 셀비 루크스와 결혼하였다. 도로시는 남편의 건강이 어렵게되자 연주 활동을 중지하고 오로지 교회일에만 봉사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도로시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젊은 흑인 예술가를 위한 학교를 교회 부설로 건립하였다. 할렘예술학교는 1963년 12명의 젊은 피아니스트 학생들을 도로시가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 문을 열었으며 오늘날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예술학교로 성장하였다. 1979년 도로시가 이 학교의 교장직을 은퇴하였을때에는 이미 1천명 학생을 거느리는 대규모가 되었다. 도로시의 메트로 은퇴는 1975년이었다. 은퇴후 그는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메트로 이사회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그는 1996년 고향인 버지니아의 노포크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음성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특히 흑인사회에서는 미국을 빛낸 전설적인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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