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기품, 지성, 미모의 삼위일체 Eleanor Steber (엘레아노 슈테버)

정준극 2008. 2. 26. 17:58

▒ 기품, 지성, 미모의 삼위일체 Eleanor Steber (엘레아노 슈테버) 

 

   

 

  

 

소프라노 엘레아노 슈테버만큼 기품과 지성을 겸한 아름다운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엘레아노 슈테버가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착각하여 인사도 건네지 않은채 지나쳤다는 얘기가 있다. 엘레아노 슈테버는 앙글레, 또는 티티안의 명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다. 엘레아노 슈테버는 1916년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 휠링(Wheeling)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엘레아노의 가정은 음악 가정이었다. 엘레아노는 어릴때부터 아마추어 성악가인 어머니로부터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엘레아노를 기회있는대로 음악회에 데려가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특히 어머니는 학교에서나 공회당 같은데서 노래를 부를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어린 엘레아노를 참가시켜 노래를 부르도록 적극 권장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엘레아노는 보스톤의 뉴 잉글랜드 음악원(Conservatory)에 입학했다. 엘레아노는 원래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로 성악을 공부키로 결심했다. 22세에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엘레아노는 방송에도 자주 출연했으며 여러 곳의 교회에서 오라토리오를 불렀다.


엘레아노의 오페라 데뷔는 21세 때인 1936년이었다. 바그너의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젠타(Senta)역을 맡았다. 아직도 학생이었던 엘레아노로서는 무척 벅찬 역할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마쳤다. 관중들은 엘레아노의 그 청순한 아름다움과 고요하고 깨끗한 음성에 압도당하였다. 2년후, 졸업과 함께 엘레아노는 뉴욕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폴 알타우스(Paul Althouse)라는 유명한 성악지도 선생을 만나 성악가로서의 기량을 완벽하게 다듬었다. 1940년 엘레아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오디션에 당당히 1등으로 합격하여 메트로와 출연 계약을 맺었다. 그 해에 엘레아노가 메트로에서 맡은 첫 역할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중에서 조피(Sophie)였다. 모두들 엘레아노의 아름다운 연기와 노래에 매료당했다. 젊은 엘레아노는 당대의 유명 지휘자인 토마스 비�경, 브루노 발터,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등의 지휘로 공연하는 영광을 안았다. 엘레아노는 어학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오페라를 원어대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를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오페라 출연 제안이 많았다. 엘레아노의 명성은 뉴욕을 벗어나 시카고, 샌프란시스코를 건너 유럽까지 떨치게 되었다.

 


1950년에 들어서서 메트로에 보이지 않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루돌프 빙(Rudolf Bing)이 음악 총감독을 맡은후부터 어쩐 일인지 엘레아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공연에서 제외되기가 일쑤였다. 대신 레나타 테발디, 또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주역이 돌아갔다. 루돌프 빙은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아티스트가 맡아야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아노는 메트로에서 은퇴할때까지 286회의 출연을 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116회의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28편의 그랜드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아했다. 엘레아노는 고음을 아주 쉽게 냈으며 저음에서도 풍부하고 비단결 같은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엘레아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적격이었다. 특별히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역, 마적에서 파미나, 돈 조반니에서 돈나 안나역, 그리고 심지어 ‘후궁에서의 도피’에서 콘스탄체역은 당시 메트로에서 감히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뛰어난 미모는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모든 오페라의 무대를 찬란하게 빛내주는 것이었다.


엘레아노는 연륜과 함께 음성이 성숙해지자 독일과 이탈리아 레퍼토리에서 스핀토(Spinto) 역할을 맡아했다. 이에는 비올레타, 엘리자베타, 데스데모나, 마르게리테, 마농 레스코, 미미, 토스카, 그리고 ‘장미의 기사’에서 마샬린역이 포함된다. 엘레아노의 영역은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걸치게 되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에바역과 로엔그린에서 엘자역을 주로 맡았다. 엘레아노는 1955년 메트로에서 미국 초연된 라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라벨라에서 타이틀 롤을 노래했으며 1959년에는 역시 메트로 초연인 베르크의 보체크에서 마리 역에 과감히 도전하여 갈채를 받았다. 엘레아노 슈테버의 무수한 오페라 역할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사무엘 바버의 바네싸(Vanessa)에서 타이틀 롤일 것이다. 이 역할은 처음에 마리아 칼라스에게, 두 번째로는 세나 유리나크(Sena Jurinac)에게 제안 되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없어서인지 거절하였고 마침내 엘레아노에게 제안되어 맡게 되었다.

 

엘자(로엔그린)


엘레아노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소프라노였다. 그의 음성은 감미로우면서도 폭이 넓었다. 그의 라사이틀은 5종경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과 모든 성악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메트로의 낮 공연에서는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부르고 저녁 공연에서는 ‘여자는 다 그래’에서 휘오르딜리지역을 맡아 한것은 지금까지도 전설적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엘레아노는 2차대전후 미국 성악가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초청받아 출연하기도 했다. 갈채속의 무대 생활과는 달리 그의 개인생활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에 걸친 결혼은 실패로 끝났고 이로 인한 심적 부담 때문인지 어느때 부터인지 알콜과 천식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1962년, 엘레아노는 오페라를 잠시 뒤로 미루고 독창회와 협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한편, 엘레아노는 남편과 함께 레코드 제작회사를 운영하였다. 레코드 라벨은 ST/AND였다. 슈테버와 남편 이름인 Andrew를 합한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사업이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사업을 확장키로 했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엘레아노는 비참한 손해를 보고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콘스탄체

엘레아노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약 10년간 클리브랜드음악원의 성악과장을 맡아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뉴욕의 줄리아드와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가르쳤다. 1978년부터 2년 동안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음악원의 초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엘레아노는 1875년 젊은 성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엘레아노 슈테버 음악재단’을 설립했다. 실상 엘레아노는 대단한 학구파였다. 그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아리아 연구’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엘레아노는 1990년 향년 75세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랭혼(Langhorne)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아름답고 지성적인 디바를 잃은 슬픔에 한없이 젖어 있었다. 엘레아노와 M Sloat가 공동으로 집필한 ‘엘레아노 슈테버 자서전’은 1992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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