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애국자 Emmy Destinn (에미 데스틴)
1878년 프라하에서 태어나 1930년 52세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난 에미 더스틴은 뛰어난 재능으로서 20세기 초반 세계무대를 압도하였던 전설적인 소프라노이며 뛰어난 애국자였다. 음악면에 있어서 그는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바그너 오페라의 초연에 출연하여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가적인 견지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후 조국 체코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는 고통받는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였던 뜨거운 민족애의 표상이었다. 프라하의 부유한 집안에서 에밀리 키틀로바(Emillie Kittlova)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여 이미 12세 때에 천재적 바이올리니스트로 찬사를 받았다. 에밀리는 자기에게 바이올린보다 성악적 소질이 더 있는 것을 깨닫고 13세 때부터 성악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에밀리를 가르친 선생은 유명한 뢰베 데스틴(Loewe Destinn)이었다. 데스틴은 참으로 훌륭한 스승이었다. 나중에 에밀리는 데스틴 선생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존경하는 뜻에서 자기의 이름을 데스틴으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에밀리는 한번 들은 음악은 절대로 잊지 않고 재현하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아무리 힘든 성악 훈련이라고 해도 어려움 없이 소화해 나갔다. 뢰베 데스틴 선생은 이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20세의 에밀리를 오페라 무대에 데뷔시켰다.
1898년, 에밀리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거장 라히르트 슈트라우스의 초청을 받고 베를린에서 살로메의 타이틀 롤을 맡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곡자인 R 슈트라우스는 에밀리의 살로메에 대한 해석과 표현에 감동을 받아 에밀리를 살로메의 표본으로 삼기로 했다. 에밀리는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 바그너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1901년 바이로이트에서 젠타(방랑하는 화란인)의 이미지를 창조하여 후세에 남겼다. 또한 에밀리의 뛰어난 음악성에 감동한 푸치니는 1905년 나비부인의 런던 초연에서 에밀리에게 주역을 맡아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다. 나중에 푸치니는 에밀리를 염두에 두고 ‘황금 서부의 아가씨’를 작곡했다고 한다. 1910년 메트로폴리탄에서의 ‘황금 서부의 아가씨’ 세계 초연에는 에밀리가 ‘디바 에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타이틀 롤을 맡았다. 상대역은 당대의 테너 카루소였으며 지휘는 토스카니니가 맡은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푸치니가 직접 객석에 참관한 이 오페라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에미 데스틴은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이 극장에서 1904년 돈 조반니의 돈나 안나로 데뷔한 이래 11년 동안 18편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아 230녀 회의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911년 조지 5세의 대관식 기념 공연에서 전설적인 아이다를 맡아 갈채를 받았다. 에미 더스틴은 여러 분야에 재능이 많았다. 그는 뛰어난 문필가였다. 드라마, 소설, 단편, 오페라 대본, 시를 써서 발표하여 찬사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화가였고 도예가였다. 그리고 가곡의 가사를 쓰고 작곡하였다. 그는 특히 희곡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첫 작품은 16세 때에 썼으며 그 이후로도 몇편의 드라마 희곡을 써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위트가 있으며 유머가 풍부하였고 편지쓰기를 좋아하여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수백통의 편지는 오늘날 귀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5개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하였고 체코어와 독일어로 문학작품을 쓰는 재능이 있었다.
에미 데스틴은 세계 각국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수많은 곳을 여행하였지만 조국인 체코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조국애는 오히려 그의 경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1차 대전중 그는 미국에 있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미국에 남아 있기를 간청하였으나 에미 데스틴은 분연히 조국 체코로 돌아갔다. 미국에 있는 체코 자유주의자들은 에미 데스틴의 편에 저항운동에 관한 서신을 보냈다. 이것이 발각되어 그는 거의 사형을 당할뻔하였다. 프라하에서 에미 데스틴은 오스트로-헝가리 군대를 위해 연주를 하라고 지지 받았으나 그는 이를 단연코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2년간 자택에 연금된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미 데스틴의 조국애는 식을줄을 몰랐다. 비록 공식적인 공연은 하지 않았으나 세계 각국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일부러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집의 정원과 공원에서 즉흥적인 야외연주회를 가져 큰 박수를 받았다.
1918년 전쟁이 끝난후 에미 데스틴은 전쟁의 여파로 고통받고 있는 체코의 농민들과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으로부터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한 여러 차례의 연주회를 가졌다. 에미 데스틴은 체코 해방을 위한 혁혁한 투사로서 체코의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어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에미 데스틴은 힘에 겹도록 조국을 위해 봉사하였던 결과, 더 이상 무대에 서기가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런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 기념음악회였다. 에미 더스틴은 공군 조종사인 요세프 할슈바하라는 사람과 결혼하였지만 여러 면에서 뜻이 맞지 않아 얼마후 헤어졌다. 위대한 아티스트의 말년은 불행하였다. 그는 런던에서 고독과 가난속에서 생의 마지막 몇 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1930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발표되자 세계는 애도속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이다
엘자(로엔그린)
루이제 미뇽
최초의 미니(황금서부의 아가씨)
네다(팔리아치)
발렌틴(위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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