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독일의 나이팅게일 Erna Sack (에르나 자크)

정준극 2008. 2. 27. 09:31
 

▒ 독일의 나이팅게일 Erna Sack (에르나 자크)


‘독일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던 뛰어난 소프라노이며 사랑받는 영화배우였던 에르나 자크는 1898년 베를린의 슈판다우(Spandau)에서 태어났다. 이 뛰어난 소프라노의 인생은 그야말로 동화속의 이야기와 같은 특별한 경우였다. 서민층 가정에서 태어난 에르나 자그카 마치 혜성처럼 어느날 갑자기 오페라무대에 등장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고 계속하여 찬란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동화속의 이야기와 같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재능을 다른 사람이 우연히 발견하여 빛나게 해주었기 때문에 동화같다는 것이다. 원래 에르나 베버(Erna Weber)라는 이름의 그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녀시절부터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는 노래를 부르는 일이 너무나 좋아서 다음에 크면 성악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음악이나 무대 등 예술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딸이 성악가가 되겠다고 하자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래를 부른다든지, 또는 무대에 선다든지 하는 것은 처녀로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없는 살림에 딸하나만을 잘되게 하기 위해 사는 부모로서는 반대를 할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성악가가 되려면 그때부터라도 부지런히 유명한 선생에게서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가난한 부모로서는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16세때에 고등학교를 나온 에르나는 어느 회사의 비서로 취직하여 자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다행히 몇 년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 에르나는 약간의 돈을 모을수 있었고 그 돈으로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에 에르나의 경력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날 어떤 젊은이가 우연한 기회에 에르나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당장에 에르나가 얼마나 재능이 있는 여자인지를 알아차렸다. 헤르만 자크(Hermann Sack)라는 이름이 이 젊은이는 에르나가 제대로 레슨만 받으면 뛰어난 성악가가 될수 있다고 믿고 비엔나에서의 유학을 주선해주었다. 그리고 에르나의 부모를 만나 단단히 설득하였다. 완강하게 반대하던 에르나의 부모도 결국은 에르나의 성악공부를 허락했다. 헤르만 자크와 에르나 베버는 곧 약혼을 하고 얼마후 결혼하였다. 에르나는 원래 메조로서 훈련을 받았지만 비엔나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나서는 소프라노가 적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르나는 처음에 간단한 오페라에서 단역을 맡기 시작하다가 점점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르나는 자기의 목소리가 얼마나 환상적인 고음을 낼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중 중대한 계기가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날 에르나는 베를린에서 돈 파스쿠알레(노리나)의 리허설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는 ‘아니, 저만한 실력이면 실제로 무대에 올라서도 아무런 손색이 없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여 다음날 에르나를  무대에 출연토록 했다. 단, 브루노 발터는  에르나에게 노리나(Norina)의 아리아에서 카덴짜를 즉석에서 마음대로 불러보라고 요청했다. 에르나는 용기를 내어 카덴짜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높이,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가서 마침내 저 높은 창공을 화려하게 수놓는듯 했다. 그는 하이 G를 뛰어넘어 하이 C까지 소리를 냈다. 에르나 자신도 놀랐고 청중들도 놀랐다. 이 사실은 다음날 베를린 음악계에 커다란 뉴스가 되었다. 이로써 에르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영광스러운 경력을 시작하였다. 곧이어 비스바덴(Wiesbaden)오페라에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비스바덴오페라의 출연은 베를린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베를린보다 훨씬 큰 영향을 준것이었다. 비스바덴의 오페라 공연은 전독일에 중계방송된 것이었다. 


1934년 에르나는 전통의 드레스덴 오페라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명지휘자 칼 뵘(Karl Böhm),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주목을 끌어 ‘그림자 없는 부인’의 세계초연에서 이조타(Isotta)를 맡아 공연했다. 1937년 에르나는 드디어 비엔나 슈타츠오퍼에 ‘밤의 여왕’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사람들은 오래만에 나타난 뛰어난 콜로라투라에 대하여 한없는 갈채를 보냈다. 그때부터 에르나는 ‘독일의 나이팅게일’로 불리었다. 이후 그는 파리, 런던, 로마(티토 스키파와 마적 공연), 코펜하겐, 스톡홀름, 오슬로, 그리고 미국의 카네기 홀에서는 리챠드 타우버와 함께 공연함으로서 세계적인 디바로 올라섰다. 에르나 자크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는 공연후 무대뒤로 몰려온 팬들의 수가 공연 홀에 있던 전체 사람들보다 많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에르나 자크는 한창 전성기에 영화 제작사의 출연 교섭을 받아 두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1936년의 ‘니짜의 꽃’(Blumen aus Nizza)와 1938년의 나논(Nanon)이었다. 그의 노래와 미모는 음악 팬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화 팬들의 우상이었다. 에르나는 전쟁중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나치 독일이 그의 연주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저 멀리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에르나 자크는 1972년 독일의 마인츠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