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최고의 모차르트 콜로라투라 Erna Berger (에르나 버거)

정준극 2008. 2. 27. 09:31
 

▒ 최고의 모차르트 콜로라투라 Erna Berger (에르나 버거)


1900년 독일 드레스덴 부근의 코쎄바우데(Cossebaude)에서 태어난 에르나 버거에 대하여 명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에르나는 음악 그 자체이다. 그를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에게서 순수한 음악을 발견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에르나는 베스트이다.’라고 말했다. 에르나 버거는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드레스덴과 비엔나의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였던 놀라운 재능의 소프라노였다. 에르나는 어릴때부터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에르나는 다섯 살 때에 사람들 앞에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중 Leise, leise, fromme Weise를 음정하나 틀리지 않고 춤을 추며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일이 있다. 한마디로 에르나는 음악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좋아하고 전념했던 아티스트였다. 10대 초의 소녀 때에 에르나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피아노를 공부했다.


에르나의 아버지는 철도 설계기사로서 모험심이 있어서 여행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철도망 설계 일을 맡아 아프리카에서 몇 년이나 지냈다. 이 기간동안 어린 에르나는 드레스덴의 숙모집에서 지냈다. 에르나는 열일곱살 때에 우연히 당대의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레트버그(Elisabeth Rethberg)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회가 생겼다. 엘리자베트 레트버그는 에르나의 특별한 재능을 당장 알아채고 유명한 드레스덴오페라극장의 합창단원이 되도록 알선해 주었다. 에르나는 몇년동안 드레스덴 오페라에서 무료로 성악 훈련을 받을수 있는 특전까지 받게 되었다. 젊은 에르나는 이같은 행운에 너무나 기뻐했지만 운명은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에 아버지가 남미 파라과이로 이민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드레스덴오페라에서 꿈을 펼치려던 에르나는 실망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파라과이에서의 이민 생활을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땀흘리는 노력으로 생활은 점차 안정되고 여유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운명은 심술을 부리기 마련이었다. 더운 지방의 열악한 환경에서 너무나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지칠대로 지친 아버지는 회복할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었고 얼마후 세상을 떠나고 말�다. 가세는 기울었고 에르나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에르나는 마침 어떤 부유한 프랑스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갈수 있었다. 하나님은 에르나에게 고생 후에 영광이 온다는 진리를 가르치려 했던것 같았다. 에르나는 그 프랑스 가족의 집에서 충분한 보수를 받았다. 더구나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배울수도 있었다. 에르나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몬테비데오(Montevideo)에 나가 오페라 아리아를 공부했다. 얼마후 에르나는 유럽에 돌아가 음악공부를 할수 있을만큼 저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3세의 젊은 나이로 홀로 여객선을 타고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다.


소프라노로서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으로 돌아가는 여객선에서였다. 에르나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3등칸에 탔지만 곧 그의 노래 솜씨가 승무원 사이에 알려져 1등칸에 초청을 받아 살롱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1등칸 살롱에는 단체로 여행하고 있는 다섯명의 독일인 부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에르나는 특별히 이들을 위해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의 가곡을 불렀다. 이 부인들은 에르나의 노래에 감동하여 에르나가 당장 1등석으로 옮길수 있도록 돈을 내겠다고 했지만 마침 1등석에 선실이 없어서 그대로 3등칸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 부인들은 대신 돈을 모아 에르나에게 주었다. 드레스덴으로 돌아온 에르나는 우선 생활을 위해 어떤 사무소에 직원으로 취직하였다. 그러면서 유명한 테너 막스 히르첼(Max Hirzel)의 부인으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25년, 에르나는 마침내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하여 보답을 받기 시작했다. 드레스덴오페라에 수브레트 소프라노로서 계약을 맺게 된것이다. 드레스덴오페라에서의 첫 출연은 단역이었다. ‘마적’에서 첫 번째 소년을 맡은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탄호이저에서 젊은 양치기 역할을 맡았다. 나중에 그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아래 같은 역할을 맡아 서서히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르나의 출발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언젠가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올림피아를 맡게 되어 있는 소프라노가 갑자기 아파서 출연할수 없게 되었다. 당황한 드레스덴오페라 측은 급히 라이프치히로부터 대역을 구하기로 하였다. 에르나는 음악총감독에게 당당하게 ‘왜 언제나 다른 극장으로부터 비싼 출연료를 주며 사람을 구하십니까? 제가 대신하면 돈이 들지 않는데요! 저는 그 역할을 얼마든지 맡아 할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음악총감독은 반신반의했지만 에르나의 당당함에 눌려서 '좋아요! 할수 있다니 한번 해 보세요!‘라며 허락했다. 그날 저녁 에르나는 열광하는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기쁨에 넘친 드레스덴오페라는 에르나에게 계속 다른 역할을 맡겼다. 오스카(가면무도회), 앵헨(마탄의 사수), 블론드헨(후궁에서의 도피) 등이었다. 얼마후 에르나는 잘츠부르크의 초청을 받았다. 에르나의 블론드헨은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베를린의 초청을 받았다. 베를린과의 인연은 1934년 푸르트 뱅글러는 에르나를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전속토록 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에르나는 이곳에서 비올레타, 질다, 마르타, 콘스탄스, 미미, 초초상으로 위대한 개선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질다(리골레토)는 에르나의 대표적인 역할이었다. 에르나의 Caro Nome는 한점의 흠도 없는 맑고 순수한 것이었다. 리골레토에서 에르나의 상대역을 맡았던 테너 베냐미노 질리(Beniamino Gigli)는 공연이 끝난후 모든 갈채를 신인인 에르나에게 돌리는 맨너를 보여 오히려 존경을 받았다.


에르나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무려 30여 역할을 소화하였다. 조피(장미의 기사), ‘밤의 여왕’(마적), 체르비네타(낙소스의 아리아드네)는 콜로라투라로서 가장 뛰어난 역할이었다. 에르나의 명성은 이윽고 다른 나라로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에르나는 런던, 암스테르담, 비르셀로나, 브뤼셀, 잘츠부르크, 비엔나, 로마, 파리, 부다페스트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1934년 에르나는 노르웨이의 어떤 엔지니어와 결혼했다. 에르나는 2차대전이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베를린을 떠나 노르웨이 시민권을 가질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베를린 슈타츠오퍼를 지켰다. 전쟁후 폐허가 된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재건을 위해 누구보다 앞서서 헌신한 것도 에르나였다. 전쟁이 끝난후 얼마 되지 않아서 에르나는 다시금 국제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50년 메트로에서의 데뷔는 조피(장미의 기사)였다. 에르나는 메트로를 빛나게 한 우상이었다. 메트로에서 몇 년 동안 활동한 그는 1955년 마침내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그후로는 미국, 호주, 일본 등지에서 리사이틀리스트로서 활동하였다. 마지막 은퇴 연주회는 1968년 뮌헨에서였다. 에르나 버거의 음성은 언제나 젊음에 넘친 신선한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고음에서의 서정적인 레가토(Legato)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음성만이 최고가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에르나와 거의 20년을 함께 활동했던 푸르트 뱅글러가 에르나에 대하여 다만 한마디로 ‘최고’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에르나 버거는 1990년 90세를 일기로 독일의 에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중에는 리타 슈트라이히(Rita Streich)가 뛰어났다.

 

 

  

 

      

 

  

 조피(장미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