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전설 Geraldine Farrar (제랄딘 화라)
1900년대 초반, 메트로의 전설적인 제랄딘 화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자그마하고 날씬한 편이었다. 섬세한 성격만큼이나 모습도 섬세했다. 신체적으로 보면 나무랄데 없이 균형이 잡힌 몸매였다. 제랄딘 화라는 드라마틱 콜로라투라의 음색이 담겨있는 소프라노였다. 그는 그 음색을 무대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부심이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메트로에서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서부의 아가씨’가 공연될 예정이었다. 미니역은 제랄딘 화라였다. 푸치니와 각별한 사이에 있던 토스카니니는 메트로 초연의 ‘서부의 아가씨’를 최고의 작품으로 공연하고 싶었다. 토스카니니는 모든 출연자에게 완벽을 요구하였으며 절대로 리허설에 빠지지 말것을 당부하였다. 당시만 해도 유명 디바들은 대체로 리허설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공연 직전의 드레스 리허설에도 대역에게 나가도록 하였다. 당대 최고의 디바인 제랄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의 리허설 참석을 주장하는 토스카니니에게 ‘나는 이 공연에서 스타입니다. 나에게 무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토스카니니는 ‘무대에는 스타가 없습니다. 스타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후 어느 때 오페라의 해석문제를 놓고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토스카니니가 ‘도대체 성악가들은 지휘자의 말에 따르지 않고...’라면서 은근히 화라를 빗대어 자기의 평소 지론을 펼쳤다. 이 말은 들은 화라는 조금 건방진,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 상냥한 말투로 ‘사람들은 나의 얼굴을 보러 오는 것이지 선생님의 등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여 토스카니니를 무안하게 만들 일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제랄딘 화라가 어떤 모습이며 무대에서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일설에는 화라와 토스카니니는 상당한 로맨스 상태였으며 화라가 토스카니니에게 ‘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이탈리아에 있는 가족을 택할 것이냐’고 다그쳤으나 토스카니니는 결국 이탈리아를 택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했다는 것이다.
헤랄드 트리뷴의 음악평론가 크레비엘이 쓴 제랄딘 화라의 메트로 출연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면 화라의 면모를 일순간 느낄수 있다. 크레비엘은 ‘화라는 마치 아름다운 환상처럼 나타났다. 젊음과 사랑스런 매력이 그의 얼굴에서, 그의 몸매에서, 그의 동작에서 느낄수 있었다. 화라의 노래는 절묘하였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감정이 동요되는 것을 느낄수 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전심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마치 본능적으로 연기를 하였다’라고 썼다. 뉴욕 타임스의 알드리히는 다음과 같이 썼다. ‘화라는 풍부하고 완벽한 음성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리릭이지만 소프라노의 어느 장르에서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리릭에서 오히려 어두운 음색을 보여주고 있음은 대단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두운 음색도 그의 타고난 연기력으로 드라마틱하게 승화시키는 절묘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제랄딘 화라의 등록상표는 나비부인에서 ‘어떤 갠 날’(Un bel di vedremo)이었다. 화라는 한없이 절제해야만 하는 한 가련한 여인의 내면을 노래로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화라의 아리아를 듣고난 관객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수 없었다.
메트로의 디바로서 1920년대까지 세계 최고의 디바로 활동했던 제랄딘 화라는 1882년 2월 28일 매사추세츠 주의 멜로우스(Melrose)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라는 젊은 나이로 베를린 오페라에 데뷔하였으며 1906년 메트로에 합류하기 전, 몬테 칼로에서 2-3년을 보내며 디바로서의 길을 다져왔다. 그는 수많은 역할을 맡아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비부인, 카르멘, 마농, 미미, 그리고 토스카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다른 역할은 전혀 맡아하지 않았다. 화라는 거장 세실 B 데밀이 감독한 영화 카르멘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전세계에 카르멘에 대한 표준 이미지를 제공해 주었다. 화라는 여러 편의 무성 영화에도 출연했다. 1931년, 화라는 49세의 나이로 메트로의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후 그는 메트로 오페라 공연의 방송 해설자로, 적십자 회원으로, 공화당원으로 활약했다.
제랄딘 화라는 전설적인 디바였다. 그는 1차대전후 메트로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그의 출연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메트로를 살려낸 인물이었다. 그는 메트로의 우상이었다. 메트로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공연은 ‘거위 아가씨’일 것이다. 무대에 거위 수십마리가 등장하도록 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마 거위들도 제랄딘의 미모와 노래에 정신을 빼앗겨서인지) 아주 순순히 제랄딘을 따랐다는 것이다. 제랄란 화라가 40세에 레온카발로의 ‘자자’를 마지막으로 메트로에서 은퇴하였다. 은퇴하던날, 1만명 이상의 팬들이 메트로 앞에서 제랄딘에게 아쉬운 석별의 정을 표현했다. 메트로의 건물 앞에는 수많은 꽃다발과 플래카드가 산적해 있었다. 제랄딘은 마치 여왕처럼 왕관을 쓰고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전설적인 제랄딘 화라는 1967년 3월 11일 코네티커트주의 릿지필드(Ridgefield)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타이스
미미 마르가레트(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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