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나부코'의 악보를 들고 있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그는 '나부코'의 초연에서 아비가일레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위대한 남성의 뒤에는 위대한 여성이 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베르디로 하여금 그의 최대 걸작인 오텔로와 마지막 작품인 활슈타프를 쓰게 만든 여인이다. 주세피나는 이탈리아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베르디의 두 번째 부인이다. 주세피나와 베르디는 거의 40년에 이르는 인생을 함께하였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1815년 9월 8일 롬바르디 지역의 로디(Lodi)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베르디보다는 2살 아래였다. 주세피나는 오르가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아버지 펠리치아노 스트레포니(1797-1832)로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다. 주세피나의 아버지 펠리치아노 스트레포니는 몬차(Monza)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상당히 성공한 오페라 작곡가였다. 어린 주세피나는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던 중에 183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주세피나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주세피나가 사려가 깊고 어려움에 잘 견디며 가정적이 된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때문인것 같다. 음악에 재능이 넘치는 주세피나는 183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밀라노음악원에 들어갔다. 그러던중 183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주세피나는 밀라노음악원에서 장학금을 받아 음악공부를 마칠수 있었다. 주세피나는 밀라노음악원에서의 마지막 해인 1834년에 벨 칸토로서 1등상을 차지하였다.
주세피나가 오페라 성악가로서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밀라노음악원을 졸업한 해인 1834년 밀라노의 테아트로 오르페오(Teatro Orfeo)에서 초연된 루이지 리치(Luigi Ricci)의 오페라 '로젬버그의 키아라'(Chiara di Rosembergh)에서 아드리아를 맡은 것이었다. 그리고 주세피나가 처음으로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듬해 봄에 트리에스테의 테아트로 그란데에서 로시니의 '샤브란의 마틸데'(Matilde di Shabran)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이후 주세피나는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으로부터 출연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주세피나는 아버지가 없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오페라에 열심히 출연하였다. 1835년, 주세피나는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벨리니의 '노르마'의 타이틀 롤과 '몽유병자'의 아미나를 불렀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비엔나는 주세피나에게 좀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1년이 넘게 비엔나에 머물면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그리고 1836년에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주세피나는 뛰어난 소프라노였지만 비엔나 공연 이후, 이탈리아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오페라에 출연한 일은 한번도 없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주세피나는 테너 나폴레오네 모리아니(Napoleone Moriani)와 사귀기 시작했다. 주세피나가 21세때였다. 그 결과 두 명의 사생아가 태어났다. 모리아니와 주세피나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에서 오페라에 함께 출연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주로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오페라에서 상대역을 맡아 출연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길게 계속되지 못하였다.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세피나로서는 모리아니의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세피나는 1840년대 초반에 라 스칼라의 지배인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에게 가기 위해 모리아니를 떠났다. 두 사람은 역시 사생아인 아들 하나를 두었다. 허지만 주세피나와 메렐리의 관계는 몇년 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세피나와 메렐리의 관계는 베르디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청년 베르디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서 그를 메렐리에게 천거하고 라 스칼라와 계약을 맺도록 한 사람이 바로 주세피나였다. 베르디의 첫 두 오페라가 라 스칼라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베르디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메릴리에게 베르디로 하여금 또 한번의 기회를 갖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서 '나부코'를 작곡하게 만든 것도 주세피나였다.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말할수 없이 커다란 역할을 맡아 한 인물이었다.
주세피나는 183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유명인시가 되었다. 1836년에 주세피나는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로시니의 '도둑까치'(La gazza ladra)의 니네타, 벨리니의 '청교도'(I puritani)의 엘비라,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의 타이틀 롤을 맡아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볼로냐 시립극장에서 엘비라를 다시 맡았고 이어 도니체티의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에서 엘레나, 도니체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1838년에는 리보르노의 제국극장(Imperial Regio Teatro)에서 도니체티의 '루덴츠의 마리아'(Maria di Rudenz)의 타이틀 롤, 벨리나의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의 타이틀 롤, 카를로 코치아(Carlo Coccia)의 '주사의 카테리나'(Caterina di Giusa)의 타이틀 롤을 맡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라 스칼라 데뷔는 1839년이었다.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첫 오페라인 '오베르토'의 초연에서 레오노라를 맡은 안토니에타 마리니 라이니에리(Antonietta Marini-Rainieri)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대타로서 출연하였다. 주세피나는 '오베르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어서 그나마 대실패는 거두지 않게 되었다. 주세피나가 1830년대에 맡았던 다른 주요 역할들은 메르카단테의 '일 주라멘토'(Il giuramento)에서 엘라이사,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아디나, 루이지 리치의 '스카라무슈의 모험'(Un'avventura di Scaramuccia)에서 산드리나 등이었다.
데뷔 당시의 주세피나 중년의 주세피나
주세피나는 1840년대에도 높은 인기를 차지하며 활동했다. 그중에서도 1841년 로마의 아폴로 극장에서 초연된 도니체티의 '아델리아'(Adelia)에서 타이틀 롤을 노래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아델리아는 로시니가 주세피나를 위해 작곡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842년에는 라 스칼라에서 베르디의 걸작 '나부코'에서 아비가일레를 맡았다. 대단한 찬사를 받었다. 주세피나는 이듬해에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에서 아비가일레를 맡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소프라노로서 인정을 받았다. 역설적으로 말하여 주세피나의 출연으로 '나부코'는 점점 더 유명해졌다. 1843년에는 도니체티의 '로베르토 드브러'에서 엘리사베타, 벨리나의 '해적'(Il pirata)에서 이모제네를 맡아 빛나는 명성을 계속 유지하였다. 1840년대에 주세피나가 맡았던 역할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벨리니의 '노르마'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것, 베르디의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에서 포지오 후작부인을 맡았던 것, 그리고 조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의 '사포'(Saffo)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 등이었다.
노년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1841년 도니제티는 주세피나를 위해 아델리아(Adelia)를 작곡했다. 도니제티도 주세피나를 사랑했던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한다. 로마 아폴로극장에서의 아델리아 초연에서 주세피나는 옛날과 같은 빛나는 음성을 들려주지 못했다. 평론가들은 주세피나의 사생활을 빗대어서 소리가 쇠퇴해졌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주세피나를 찾는 극장이 점점 줄어들었다. 1942년 주세피나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베르디의 성공작인 나부코에 출연키로 하고 리허설에 들어갔다. 주세피나가 나부코에서 맡은 역할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역인 아비가일이었다. 나부코가 막을 올리기 며칠전, 의사들은 주세피나에게 ‘노래 부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의심할 여지도 없이 폐병환자가 될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세피나는 아비가일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주세피나는 모두 8회의 출연을 예정대로 끝내기는 하였다. 그 이후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인 롬바르디(I Lombardi)에서 기셀다(Giselda)를, 에르나니(Ernani)에서 엘비라(Elvira)를 맡아 혼신을 다하였다. 기셀다와 엘비라는 매우 드라마틱한 역할이어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주세피나는 너무나 힘든 공연을 하였고 게다가 지병이 도져서 도저히 더 이상 무대에 설 형편이 못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세피나는 몸이 쇠약해지고 고단하여서 도저히 다른 역할들을 맡을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사실 주세피나는 첫번째 애인인 테너 모리아니에게서 두 아이를 낳았고 두번째 애인인 메렐리에게서 한 아이를 낳은 미혼모였다. 당시에는 그런 경우를 ‘불행한 사건’(Unfortunate Accident)라고 불렀다. 주세피나에게는 그런 ‘불행한 사건’이 한두번 더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아름다운 프리마 돈나로서 밀려드는 유혹들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튼 몇 번의 출산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의 음성은 쇠퇴해지기 시작했고 몸도 쇠약해졌다. 더구나 명성을 위해 무리해가면서까지 출연했던 것도 이유였다. 그리하여 1840년대 중반부터는 병색이 뚜렸했고 마음마저 우울한 상태여서 도저히 오페라의 주역을 맡을 형편이 안 되었다. 1845년 팔레르모에서의 공연은 주세피나을 쇠퇴의 길로 내몰은 정점이었다. 주세피나는 관중들의 야유 때문에 공연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주세피나의 음성은회복되지 못하였다. 결국 1846년, 주세피나는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궁핍해진데다가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그는 파리로 가서 정착하고 학생들에게 성악 레슨을 하면서 근근이 지냈다. 그러다가 1847년 파리에서 베르디를 다시 만났다. 사실 그동안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서로 편지를 교환하며 지내왔던 터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베르디는 파리에서 롬바르디를 예루살렘(Jérusalme)이라는 타이틀로 바꾸고 작품을 수정하였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옆을 떠나지 않고 도와주었다.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실제로 1848년부터 파리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1890년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작은 마을인 부세토(Busseto)는 베르디와 페피나(Peppina: 주세피나의 애칭)가 파리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정다운 모습으로 돌아오자 눈살을 찌푸리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혼도 하지 않은채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이 못마땅해서였다. 게다가 주세피나는 과거가 화려했던 여인이었으므로 누구나 경멸하던 터였다. 베르디와 페피나는 온갖 가십과 비난을 감수하며 지내야했다. 베르디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여 부세토의 교외에 있는 산타가타(Sant'Agata) 저택으로 이사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듬해 베르디는 불후의 걸작인 라 트라비아타의 작곡에 들어갔다. 말할 나위도 없이 페피나를 생각하여서 비올레타에게 동정심을 쏟았을 것이다. 베르디는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남들의 시선을 피해 파리를 떠나 시골에 가서 지낸 스토리를 자기들의 케이스에 비추어 반영하였으며 부세토 마을의 못마땅하고 완고한 사람들을 한껏 경멸하였을 것이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초상화.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파리에서 함께 지내기 시작한 때로부터 계산하면 11년이나 이른바 내연의 관계로서 지냈다. 주세피나는 정식 결혼을 희망했지만 베르디는 선뜻 결심을 하지 못했다. 주세피나는 '아마 하나님께서 나의 지나간 죄를 벌하시는 것 같다. 나는 죽기전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정당한 기쁨을 누리게 되지 못할 것 같다'라고 글로 남겼다. 그러한 주세피나의 소원이 하늘의 응답을 받았던지 베르디는 드디어 주세피나와 더 이상 서로 불편한 관계에서 지내지 않고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1859년 8월 29일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는 도중 제네바에 머물게 되자 부근의 콜론-수-살레브(Collonges-sous-Saléve)마을의 생 마르탱(Saint Martin)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제네바는 이탈리아의 사보이 공국에 속하여 있었다. 이들의 결혼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단한 사건이었다. 마치 늙어서 늦둥이를 보는 것과 같은 가십거리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향후 50년에 걸친 결합은 서로간의 존경과 사랑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물론 어느때는 마치 수프 속에 머리카락이 빠진 것처럼 곤란한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베르디의 ‘중년 위기’는 1870년경에 시작되었다. 베르디와 페피나는 많은 면에서 서로 취향이 같았고 보완적이었다. 다만 성격만은 상당히 달랐다. 페피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비교적 명랑하였으나 베르디는 말이 없는 편이며 때로는 심술궂어서 다른 사람들을 신랄하게 경멸하는 성격이었다. 페피나는 사교적이고 붙임성이 있었으나 베르디는 허세나 부리고 사소한 일에 고함을 지르는 일이 많았으며 성미가 급하였다. 베르디는 일상 대화에 있어서 이탈리아어 이외에는 다른 외국어를 잘 몰랐다.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한두 마디 알고는 있었지만 대화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페피나는 프랑스어를 프랑스 사람보다 잘하였고 스페인어를 스페인 사람보다 잘하였다. 이같은 외국어 실력으로 페피나는 베르디를 위해 '일 트로바토레'와 '시몬 보카네그라'의 원작 소설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주기도 했다. 그런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 이해를 같이하였으며 심지어 음식과 와인에 있어서도 취향이 같았다.
아미나를 맡았을 때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베르디는 4촌의 딸, 즉 조카인 필로메나 마리아 크리스티나(Filomena Maria Cristina)를 양녀로 삼았다. 아버지 베르디와 어머니 페피나는 새로 입양한 딸을 피파오(Fifao)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피파오는 나중에 고향 부세토 사람인 알베르토 카라라(Alberto Carrara)와 결혼하였다. 베르디의 변호사의 아들로서 그 자신도 변호사였다. 베르디의 사위가 되는 알베르토는 이름을 카라라 베르디로 바꾸었고 이들은 베르디의 유산 상속자로서 산타가타(Sant'Agata) 저택에 살았다. 다시 베르디의 부인 주세피나의 얘기로 돌아가면 그는 대단히 교양 있고 지식수준이 높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현명하고 오래 참을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1969년부터 무려 7년이란 세월동안 베르디가 20세나 어린 젊은 소프라노 테레사 슈톨츠(Teresa Stolz)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어찌할줄을 모르고 슬픔과 낙심과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세피나가 테레사를 시기하고 질투하여서 못되게 굴었다고도 말하고 있으나 주세피나는 그저 눈물로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고 이에 가책을 받은 베르디가 끝내는 돌아온 탕자처럼 주세피나에게 돌아왔다는 얘기가 정설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세피나가 슈톨츠의 남편에게보낸 편지가 나중에 밝혀진 일이 있다. 주세피나는 편지에서 '정확한 사실이 없는한 조용히 지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최소한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그후로 베르디와 슈톨츠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베르디에 대한 주세피나의 한결같은 애정이 모든 것을 극복하였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베르디로 하여금 오텔로와 활슈타프를 작곡하도록 용기를 주고 권면하였다.
리코르디 등 친구들과 함께.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여자가 테레사 슈톨츠, 맨 오른쪽 앉아 있는 여자가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주세피나 베르디 스트레포니는 1897년 11월 14일 부세토 부근의 산타가타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세피나는 베르디가 51년전 처음으로 주세피나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매장해 달라고 유언하였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편지였다. 주세피나가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잘 있어요, 나의 베르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결합했던 것처럼 하늘에서도 우리 영혼이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였다. 주세피나는 베르디가 한때 자기를 멀리하였던 것을 모두 용서하고 진정한 오페라 작곡가로서 생을 마감하도록 지극히 도와준 여인이었다. 위대한 베르디의 뒤에는 실로 주세피나가 있었다. 주세피나가 떠난지 4년후 베르디도 세상을 떠났다. 그 4년 동안 소프라노 테레사 슈톨츠가 베르디를 돌보아 주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묘지. 주세피나의 시신은 처음에 밀라노의 Cimitero Monumentale에 매장되었으나 1901년 베르디가 세상을 떠난 후 Casa di Riposa per Musicisti로 이장되어 베르디의 옆에 묻혔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줄리앙 미첼(Julian Mitchell)의 1985년도 뮤지컬(Play with music)인 '아프터 아이다'(After Aida)에서 주역급으로 등장한다. '아프터 아이다'는 1879년 이후의 베르디의 삶과 작곡활동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이탈리아 작곡가인 로렌초 페레로(Lorenzo Ferrero)의 2011년도 오페라인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에도 주인공급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영화 '베르디'에서는 칼라 프라키(Carla Fracchi)가 주세피나 스트로페노 역할을 맡았다.
영화 '베르디'에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역의 칼라 프라키와 베르디 역의 로날드 피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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