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모와 재능을 겸비 Gladys Swarthout (글레이디스 스워다우트)
릴리 폰스나 제랄딘 화라(Geraldine Farrar)처럼 글레이디스 스워다우트 역시 위대한 소프라노이면서 글래머 스타였다. 배우를 능가하는 미모와 연기력의 스워다우트는 전성기에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이밖에도 라디오 출연과 레코딩으로 많은 돈을 벌어 상류사회의 생활을 하였다. 스워다우트는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인 1900년 크리스마스날, 미주리주의 광산마을인 딥워터(Deepwater)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1904년 태어났다고 되어있다. 아마 자기의 진짜 나이를 밝히기 싫어서 그랬던것 같다. 스워다우트의 태어남은 나중에 딥워터 마을의 자랑이며 영광이 되었다. 스워다우트의 집안은 음악적인 집안이었다. 아버지 프랭크는 비록 풀만(Pullman) 열차의 차장을 지냈지만 음악적 관심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여동생 로마(Romah)는 나중에 뉴욕에서 음악교사가 되었다. 사촌인 도날도와 맥스는 각각 캔사스 대학교 음대학장, 캘리포니아 대학교 음대학장을 지냈다.
스워다우트는 어릴때 병치레를 많이 하며 자라났다. 류마티즘열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병은 스워다우트가 50대에 가서야 발견되었다. 이 병으로 스워다우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워다우트의 식구들은 스워다우트가 어릴때 캔사스 시티로 이사왔고 그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스워다우트는 어릴때부터 뛰어나게 아름다운 음성을 지녔다. 그가 성악가의 길을 걷기로 한것은 자기가 성공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되돌아보면 그의 음악적 재능은 10대 소녀시절부터 확실했다. 그는 13살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직업적으로 성가를 불렀다. 캔서스 시티로 이사왔지만 아버지의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적은 월급으로 그럭저럭 생활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구들은 스워다우트의 장래를 위해 레슨비만은 낼수 있도록 서로 절약하며 지냈다. 식구들은 스워다우트의 음악적 재능을 키우기 위해 시카고음악원에 들어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스워다우트의 학비를 대기에도 무척 힘들어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카고음악원장은 스워다우트의 재능을 보고 입학을 허락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할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대학을 나온 스워다우트는 시카고 하이랜드 파크에 있는 비엔나오페라단에 입단하였다. 어렵게 공부하고 어렵게 취직한 스워다우트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온다.
캔사스의 어떤 부유한 가족이 스워다우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시카고에서 스워다우트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것이다. 스워다우트가 18세 때였다. 이후 스워다우트는 대중 연주회에 출연하기 시작하며 뛰어난 미모와 뛰어난 노래솜씨 때문에 점점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이때쯤해서 그는 시카고의 사업가인 해리 컨(Harry Kern)이란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했다. 그가 사랑 때문에 결혼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결혼후에도 그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성인 스워다우트를 유지했다. 스워다우트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없기 때문에 시카고오페라단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3년을 보낸다. 첫 오페라 출연은 토스카에서 목동 역할이었다. 한두마디 대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기는 점점 높아졌고 1929년에는 드디어 메트로폴리탄의 초청을 받아 데뷔했한다. 라 조콘다에서 시에카(Cieca)역이었다. 그후 그는 1945년까지 메트로와 연관되어 스테이지를 장식하였다. 이른바 ‘바지역할’도 여러번 맡았다. 스워다우트는 바지역할이 자기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어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리 가든과 스워다우트의 관계는 지금도 얘기꺼리가 되고 있다. 스워다우트가 메트로의 신인으로 있을 때 매리 가든과 스워다우트가 함께 카르멘에 출연한 일이있었다. 당연히 가든이 카르멘이었고 스워다우트는 단역이었다. 갑자기 가든이 분장실에서 ‘스워다우트!’라고 소리치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계속해서 가든은 ‘스워다우트, 어디 있는거야?’라고 소리쳤다. 스워다우트는 얼른 나타나서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대선배로부터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가든은 들고 있던 카르멘의 만토를 그 자리에서 둘로 찢더니 스워다우트에게 한쪽을 던지면서 ‘넌 다음번 위대한 카르멘이 될것이야!’라고 선언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 만토는 가든이 카르멘을 공연할 때 언제나 걸치고 나오던 것이었다. 가든의 선언대로 스워다우트는 훌륭한 카르멘이 되었고 가든의 반쪽 만토는 스워다우트가 집에서 피아노 덮개로 사용했다. 1939년 스워다우트가 카르멘으로 처음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면서도 어딘가 카르멘의 이미지와 다르다면서 흡족해 하지않는 평을 했다. 스워다우트의 카르멘은 종전의 칼베(Calvé), 폰셀레, 가든(Garden)처럼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유혹적이며 섹시하고 어떤 면에서는 뻔뻔스럽기까지한 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얌전한 카르멘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시골처녀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슨 카르멘이 저러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지만 음악만은 최상이었다. 사람들은 스워다우트의 아름다운 노래에 매료당했다. 그러나 카르멘 성격적 해석이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더구나 의상이 집시로서는 너무나 우아하다는 핀잔이었다. 그후 스워다우트는 메리메(Mérimée)의 소설을 무던히도 연구했다. 결과, 카르멘의 성격은 자기 일 이외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생기가 없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워다우트는 분장할때에 얼굴을 거므스름하게 했다. 원작에 ‘오래된 가죽과 같은 얼굴색’이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워다우트는 어둡고 유혹적인 카르멘의 역할을 훌륭하게 했다. ‘의상요?’ 스워다우트는 ‘카르멘은 상당기간 밀수꾼들의 한패거리로서 돈벌이를 했습니다. 담배 공장에 들어간 것은 스파이노릇을 하기위해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공장 여직공들보다 옷을 잘 입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워다우트를 스타로 만들어 준것은 카르멘이었다.
카르멘
남편 해리는 1931년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해에 스워다우트는 프랭크 채프맨(Frank Chapman)과 결혼한다. 그는 상당히 재능이 있는 테너였다. 실제로 이들은 2년전 나폴리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왔었다. 채프맨은 스워다우트에게 완전히 매료당했다. 갈색 머리에 갈색의 아름다운 눈동자, 늘씬한 키, 게다가 취미도 서로 비슷했다. 프랑스 가구 수집이었다. 새남편 채프맨은 ‘우리의 사랑은 로맨틱한 모험으로 시작되었지요. 그 감정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채프만은 그후로부터 스워다우트의 경력을 위해 충실하게 뒷바라지를 했다.
스워다우트는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겁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어렵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노력도 없이 아름다운 노래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원래 노래를 사랑했다. 그는 하루 여덟시간이나 노래 코치의 도움으로 연습을 강행했다. 그것이 끝나면 또 다시 한두시간 동안 남편과 함께 두엣을 부르며 연습을 했다. 그런후 그는 가슴 호흡을 강하게 하기위해 풍선을 불거나 비누방울을 뿜어내는 연습을 했다. 파라마운트는 너무나 아름답고 재능이 많은 스워다우트에게 반하여 영화 출연 제안을 한다. 스워다우트는 ‘Rose of the Rancho', 'Romance in the Dark', 'Champagne Waltz'등 대여섯 편의 영화에 직접 출연하여 그의 아름답고 늘씬한 모습을 과시하였다. 그는 언어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사실 재능이라기보다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영화 ‘샴페인 왈츠’에서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렀다. 스워다우트는 음악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성악가이다. 이밖에도 그는 정부의 여러 공식행사에 미국을 대표하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오만하거나 자만에 넘친 프리마 돈나가 아니었다. 따듯하고 활기에 넘친 여인이었다.
스워다우트와 남편 채프맨은 코네티커스에 저택을 갖고 있으면서 비벌리 힐스에도 스페인 스타일의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는 로렌스 티베트(Lawrence Tibbett)가 살았다. 이들은 함께 수영도 하고 요트도 즐기며 영화 일도 함께 했다. 스워다우트는 여러번이나 전미 베스트 드레써로 선정된바가 있을 정도로 맵씨있고 멋있게 옷을 입었다. 스워다우트는 운동에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 테니스, 스키, 골프, 승마, 그리고 자전거 달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운동을 통하여 항상 멋있는 몸매를 유지했다. 그리고 정원가꾸기와 요리에도 각별한 취미가 있었다. 스워다우트는 시간시간을 바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쪼개어 적십자를 위한 뜨개질을 했으며 젊은 성악도들을 가르치고 미해병대를 위문하는 일을 했다. 남편 채프맨이 해병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951년 메트로에서 고별 공연을 가졌다. 1956년 그는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여섯 시간에 걸친 대단히 어려운 심장 수술을 받았다. 몇 년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그런 수술이었다. 수술에서 회복되자 스워다우트는 심장병 질환 돕기 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1958년에는 미국심장협회가 주는 제1회 ‘올해의 심장상’을 받았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스워다우트와 채프맨은 모든 활동에서 물러난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부근에 집을 사서 지낸다. 몇 년후 채프맨이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후 세기의 디바 글레이디스 스워다우트는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병인 심장병이 재발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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