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크로아티아의 나이팅게일 Ilma De Murska (일마 데 무르스카)

정준극 2008. 2. 27. 13:54
 

▒ 크로아티아의 나이팅게일 Ilma De Murska (일마 데 무르스카)


일마 데 무르스카(또는 Ilma Di Murska)는 크로아티아가 낳은 위대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1836년(어떤 자료에는 1834년) 자그레브(Zagreb) 부근의 오굴린(Ogulin)에서 태어난 그는 자그레브와 그라츠(Graz)에서 공부를 마친후 다시 비엔나와 파리에서 오페라에 대하여 공부하고 플로렌스에서 데뷔하였다. 플로렌스 페르골라(Pergola)극장에서의 데뷔 역할은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에서 마르게르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여왕 이었다. 그는 이 역할에서 신인 콜로라투라로서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어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이어서 맡은 플로토우(Flotwo)의 마르타(Martha)에서 레이디 해리엣(Lady Harriet)을 맡은 것도 놀라운 성공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개선장군과 같은 성공을 거둔 그는 이후 바르셀로나, 부다페스트, 베를린, 함부르크 등에 등장하여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비엔나 데뷔는 1864년 왕립오페라극장(현재의 슈타츠오퍼)에서 레오노라(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로였다. 레오노라를 맡은 것은 그가 콜로라투라뿐만 아니라 무거운 드라마틱 역할도 맡아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공연은 1865년 런던의 여왕폐하극장에서 가졌던 루치아였다. 데 무르스카의 루치아는 1835년 루치아가 초연된 이후 30년만에 나타난 최고의 루치아로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데 무르스카는 영국에서 ‘크로아티아의 스타(별)’라는 칭호로서 찬사를 받았다.  한편, 비엔나는 그를 ‘크로아티아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당시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데 무르스카의 이러한 빛나는 활동으로 크로아티아의 위상이 높아진데 대하여 크게 기뻐하고 그를 존경하였다. 오늘날에 크로아티아는 엄연한 독립 국가이지만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어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겪었었다. 비엔나에서 그는 17개 각각 다른 역할로서 230여회의 오페라 공연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당시로서 그만한 위대한 프리마 돈나로는 찾아 볼수 없었으며 이로서 그는 어느 곳을 가든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데 무르스카에 대한 명성은 신대륙인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결국, 데 무르스카는 1871년 미국으로 이민가서 정착했다. 그는 1873년과 1874년 두차례에 걸쳐 미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가졌다. 뉴욕국립음악원은 데 무르스카에게 교수직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몇 년동안 후진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1889년 1월 14일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중의 한 사람인 자그레브 출신의 일마 데 무르스카는 건강이 악화되어 53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뉴욕에서 마감했다. 에마 프케세크(Ema Puksec)라고도 알려진 ‘크로아티아의 나이팅게일’ 데 무르스카의 음역은 세 옥타브에 이른다. 그의 콜로라투라 음성은 한마디로 찬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