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세계의 나이팅게일 Jenny Lind (제니 린드)

정준극 2008. 2. 27. 14:05
 

▒ 세계의 나이팅게일 Jenny Lind (제니 린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제니 린드는 음악의 역사에 전설을 만든 뛰어난 소프라노였다. 스웨덴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감동시켰고 그 인연으로 영국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제니 린드는 만인의 사랑을 받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30세 때에 처음으로 가진 미국 순회 연주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다. 제니 린드 리사이틀 입장권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독창회 티켓이었다. 미국에서의 성공, 그 이후의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의 성공으로 제니 린드는 세계의 인물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노래, 장갑, 모자, 의자, 소파, 구두, 손수건 등이 나와 날개 돋힌듯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피아노까지 ‘제니 린드표 피아노’가 나올 정도였다. 제니 린드는 50세에 독일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진후 은퇴하였고 그후 영국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운동을 펼쳐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가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고별 리사이틀을 가졌을 때 마지막으로 ‘Home Sweet Home'을 불렀을 때 장내는 눈물 바다였다. 사람들은 다시는 제니 린드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한 없이 눈물을 흘렸고 더구나 아련하게 부르는 ’Home Sweet Home'에 가슴들이 뭉클하여서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훔쳐도 그칠줄 모르고 흘렀다고 한다.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
 

제니 린드는 1820년 10월 6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Johanna Maria Lind 였다. 아버지는 학교의 언어 교사였고 어머니는 음악을 깊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어린 제니는 3살때부터 한번 들은 노래는 기가 막히도록 다시 부를수있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제니가 아홉 살때 어떤 사람이 제니가 살고 있는 집 앞을 지나가다가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이름난 음악 선생을 데리고 제니의 집을 찾아와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아이라면 자기가 후원해서라도 교육시키겠다는 말했다. 그러나 함께 온 음악 선생은 제니의 노래를 듣고 나서 다른 말은 하지 않은채 노래를 포기하는 것이 좋을것이라고 얘기했다. 그 음악 교사는 낙담한 제니를 위로하기 위해 상당액의 돈까지 내놓고 갔다. 그 음악 교사의 얘기 때문에 제니는 더 열심히 노래 공부를 하여 끝내는 세계를 움직인 소프라노가 되었다. 제니는 이미 10살때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18세 때에는 스웨덴 왕립 오페라극장에서 베버의 ‘마탄의 사수’의 주인공 아가테를 맡아 첫 오페라 데뷔를 하였다. 제니의 노래는 힘이 있고 청아했다. 음성에 흔들림이 없으며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후 거의 2년이란 기간동안 제니는 스톡홀름 오페라의 스타였다. 제니는 파리에서 성악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스웨덴의 각지를 순회하는 리사이틀을 가져 자금을 마련했다. 대단한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파리에 간 제니는 자기를 가르치려던 선생이 제니의 힘이 있는 노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제자로 받기 어렵다고 하는 바람에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왔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챤 안델센은 제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그러나 제니는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안델센은 제니에게 헌정하는 저 유명한 ‘나이팅게일’이란 이야기를 썼다. 제니가 23세 때인 1843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제니는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제니는 바로 그해에 마침 독일의 드레스덴을 방문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노래 부르는 기회가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드레스덴 방문을 환영하는 모임에서였다. 제니의 노래는 마치 하늘의 종달새와 같이 맑고 깨끗했으며 포근한 것이었다. 제니의 노래를 들은 빅토리아 여왕은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 영국에도 제니 린드만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적어도 제니가 우리 영국에 와서 살았으면 좋으련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얘기는 전 독일로 퍼져 나갔다. 독일 사람들은 제니가 독일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순회연주회를 위해 방문하는 도시마다 제니를 뜨겁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제니는 결국 빅토리아 여왕을 생각하여 26세 때에 영국으로 건너간다. 영국은 제니를 따듯하게 환영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제니에게 무슨 일이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얘기해 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제니는 영국에서 여러편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1847년 베르디가 I Masnadieri의 세계 초연을 런던에서 갖기로 하고 당대 최고의 젊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제니에게 타이틀 롤을 맡도록 한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아미나(몽유병자)


1848년부터 제니는 런던에서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을 만난다. 제니는 소팽을 무척 존경하여 그와 몇차례 공식적으로 만난 이야기를 일기에 자세히 써서 스웨덴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냈다. 18세의 제니는 자기보다 꼭 19년 위인 쇼팽과 결혼까지 할 생각을 한다. 이 사실을 안 빅토리아 여왕이 제니를 위해 파리 여행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쇼팽과의 결혼 계획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제니는 쇼팽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았다. 이같은 사실은 2003년 브뤼셀의 ‘Icons of Europe’이란 단체에서 제니의 비화를 발굴하면서부터 알려지게된 것이다. 쇼팽에 대한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제니는 더 이상 오페라에 출연하지 않고 다만 연주회(리사이틀)에만 가지기로 결심한다. 미국의 흥행주인 P.T. 바르눔(Barnum)을 만난것은 이때였다. 바르눔은 제니에게 미국 순회 연주를 제안하였고 1850년, 제니가 30세 때에 대장정의 미국 순회 공연에 들어갔다. 흥행주 바르눔은 뉴욕에서부터 제니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인다. 뉴욕 연주회와 그 후의 미국 대도시 순회 연주는 대성공이었다. 신문들은 제니를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부르며 연일 놀라운 사랑의 찬사를 보냈다. 제니는 보스톤 방문중에 오또 골드슈미트(Otto Goldschmidt)라는 젊은 피아니스트를 만났고 얼마후 두 사람은 보스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제니에게 소개된 반주자였다. 생각건대 쇼팽과의 못이룬 사랑을 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 같다. 2년후 제니는 남편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 이후로 제니는 공식적인 리사이틀까지도 삼가하고 대신 오라토리오, 콘서트, 합창의 솔리스트 정도로만 활동하였다. 제니는 간혹 왕립음악원에서 젊은 음악도들을 위해 강의를 하는 정도의 공식적인 활동 이외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은 생애를 불우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헌신하였다. 대백과사전에는 제니 린드의 직업을 ‘소프라노’, 그리고 ‘박애주의자’라고 적어 놓았다.

 

스웨덴에서 출범한 제니 린드호와 제니 린드의 뱃머리 장식

 

제니 린드의 마지막 연주는 1870년 그가 50세 때에 뒤셀도르프에서 있었다. 제니는 뒤셀도르프에서의 고별 연주회에서 남편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룻’(Ruth)을 불렀다. 제니는 1887년 향년 67세로 런던 부근의 작은 마을 윈즈 포인트(Wynd's Point)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말베른(Malvern)의 묘소에 안치되었다. 영국은 사랑스런 제니에 대한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제니 린드의 기념 조형물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코너에 마련하였다. 헨델과 셰익스피어의 바로 옆이다. 영국을 위해 공헌한 위대한 인물만이 들어설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영국 출신 이외의 인물은 헨델과 제니 린드밖에 없다. 더구나 시인 코너의 여성은 제니가 유일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제니를 위한 기념상에는 ‘그의 생애와 노래는 감미로운 추억이었다’라고 적혀있다. 스웨덴은 가장 단위가 높은 지폐인 50 크로네에 제니 린드의 초상화와 무대에서의 리사이틀 장면을 넣어 그를 기념하였다.

 

스웨덴의 50크로네 지폐에 등장한 제니 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