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황금의 소리 Kathryn Grayson (캐스린 그레이슨)

정준극 2008. 2. 27. 14:32
 

▒ 황금의 소리 Kathryn Grayson (캐스린 그레이슨)


‘황금의 소리’ 캐스린 그레이슨이 오페라에만 전념하였다면 아마 전세계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고도 남는 최고의 디바가 되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아름답다. 현대 성악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를 갖춘 여성일 것이다. 그의 음성은 천상의 소리와 같이 아름답고 순수하다. 어떤 평론가는 캐스린의 음성을 꾀꼬리처럼 아름답고 종달새처럼 명랑하다고 말했다. 그는 타고난 배우이다. 사람을 사로잡는 연기력이 있다. 캐스린 그레이슨은 타고난 오페라 아티스트였다. 그러나 그는 오페라 무대보다 영화를 택하였다. 더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오페라는 한정된 무대에서만 감상할수 있을뿐이며 음반이 나오더라도 무대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지 못하지만 영화는 보는 사람들을 꿈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그리고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볼수 있다.  

 

 

 

1922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윈스톤-살렘에서 태어났으나 세인트루이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캐스린 그레이슨은 소녀시절부터 뛰어난 노래 솜씨를 보여 15세 때에 이미 RCA 레드 실(Red Seal)과 레코딩 계약을 맺을 정도였다. 성악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곧 바로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진출하였다. 캐스린은 처음에 조역으로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역이 아닌 조역이라고 하지만 그의 재능과 미모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명한 MGM의 제작자 루이 마이어(Louis Mayer)가 우연히 캐스린의 노래를 듣고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며 당장 스카웃하였다. 루이 마이어는 데아나 더빈(Deanna Durbin)이 할리우드를 떠난 이후 그를 대신할 새로운 스타를 찾고 있었던 터였다. 캐스린은 MGM에서 스크린 테스트도 받지 않은채 전격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제2의 데아나 더빈’으로서 영화에 데뷔하였다. 첫 영화는 1939년의 ‘앤디 하디, 봄바람이 들다’(Andy Hardy Gets Spring Fever)였다. 사람들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이로서 오페라 디바로의 길은 영화배우로서의 길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캐스린은 계속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마침내 1943년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스타돔에 오르게 되었다. 감미롭고 따뜻한 놀라운 음성, 천사와 같은 얼굴, 빼어난 몸매, 탁월한 연기력...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스타돔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캐스린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은 MGM의 뮤지컬 영화 ‘키쓰 미 케이트’ (Kiss Me Kate)와 ‘쇼보트’(Show Boat), ‘카멜롯’(Camelot)이었다. 이어서 마리오 란자와 함께 출연한 ‘첫 사랑’(For The First Time)은 영화배우 겸 오페라 소프라노로서의 재능을 한꺼번에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었다. 뮤지컬로 성공을 거둔 캐스린은 오페라 제작자들의 끈질긴 권유로 드디어 오페라 무대에 나섰다. 1960년이었다.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나비부인, 카르멘에 출연하였다. 뮤지컬에 익숙하였던지 주인공들에 대한 진지한 해석이 부족하였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의 모습이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캐스린은 자기의 영역이 오페라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방송과 영화로 돌아갔지만 약 20년 후에 오펜바하의 ‘지옥의 오르페오’에 출연하여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MGM의 위대한 뮤지컬 시대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되자 캐스린의 은막생활도 막을 내리게 된다. 줄리 앤드류스(Julie Andrews)가 브로드웨이에서 물러나자 캐스린은 그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전반의 전성기를 다시 찾기는 힘들었다. 캐스린은 연극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 루실 플레쳐(Lucille Fletcher)의 연극 ‘Night Watch’에 출연한 것은 상당한 호평을 받은 것이었다. 시대는 극장의 연극 무대보다는 라디오와 TV가 주도하는 세상이 되었다. 캐스린은 연극무대를 떠나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연극무대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국의 풍자연극 ‘Noises Off’은 뜨거운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캐스린은 각 지역방송국의 지원을 받아 ‘캐스린 그레이슨과 함께 이 밤을’(An Evening With Kathryn Grayson)이라는 원 우먼 쇼(One Woman Show) 프로그램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대단한 반응을 얻은 것이었다. 한편 캐스린은 1996년부터 2년 동안 영화배우 밴 존슨(Van Johnson)과 함께 연애편지(Love Letters)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에 자신을 가진 두 사람은 단독으로 ‘빨간 양말과 장미’(Red Sox and Roses)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 공연하였다. 최근에는 다큐멘타리 영화의 해설자로 활약을 하였다. 1977년 ‘정신현상의 신비한 세계’(The Amazing World of Psychic Phenomena), 1994년 ‘영화 백년사’(A Century of Cenima)에 등장하여 아직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풍모와 음성을 보여주었다. 캐스린과 같은 시대에 할리우드를 풍미하였던 제인 파웰(Jane Powell), 앤 밀러(Ann Miller), 시드 샤리쓰(Cyd Charisse), 에스더 윌리엄스(Esther Williams), 앤 블라이스(Ann Blyth)등이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캐스린 그레이슨의 경우에는 팬클럽이 대단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등 그를 사랑하는 열기가 가시지 않고 있다.

 

  

 뮤지컬 That Midnight Kiss

 

캐스린 그레이슨의 사생활은 그의 화려한 경력에 비하여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그는 18세 때인 1940년 어떤 청년과 마음이 맞아 가출하여 결혼하였다. 손 쉘튼(Shelton)이란 사람이었다. 물론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고 합하기를 일곱 번이나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1946년 완전히 헤어졌다. 이듬해 캐스린은 존 존스톤(John Johnston)이란 배우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엉덩이뼈에 문제가 있었던 딸은 1년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딸이 퇴원하여 집에 돌아온후 부모는 이혼하였다. 이들은 6년후에 다시 결합하였으나 결국 1년이 지나지 못하여 또 다시 이혼하였다.  

 

 

 셔보트 포스터

 

 마리오 란자와 함께

 

뮤지컬 Toast of New Orleans

 

나비부인

 

 포트레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