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메트로의 신화를 창조 Leontyne Price (레온타인 프라이스)

정준극 2008. 2. 27. 14:41
 

▒ 메트로의 신화를 창조 Leontyne Price (레온타인 프라이스)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는 이른바 아프리칸-아메리칸 오페라 성악가이다. 프라이스는 베르디 역할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아이다는 세계대전 이후 프라이스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프라이스는 마리안 앤더슨 이후 가장 성공한 흑인 성악가이다. 그리고 그의 성공 사례는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오페라 무대 진출에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흑인 성악가들이 오페라에 진출하고 성공할수 있는 경우는 미국뿐일 것이다. 프라이스는 1927년 2월 10일 미시시피주의 로렐(Laurel)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메리 바이올레트 레온타인 프라이스(Mary Violet Leontyne Price)였다. 어릴 때에는 메리라고 불렸으나 전문 성악가가 되고부터는 레온타인 프라이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프라이스의 아버지는 목재소에 근무하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마을의 산파였다. 어머니는 노래를 좋아했고 성량이 매우 풍부하였다. 프라이스의 음악적 재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레온타인의 부모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 보이는 어린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유가 없어서 생각 끝에 가보로 내려오는 축음기를 팔아 작은 피아노 한 대를 사주었다. 레온타인은 어릴때부터 피아노에 매달려 혼자서 노래 연습을 했다.


레온타인의 옆집에는 치스홀름(Chislohm)이라는 신사분이 살았다. 여유있는 백인이었다. 치스홀름은 레온타인을 볼때마다 노래 공부 잘하라고 격려하고 자기 집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특별히 레온타인을 초청하여 노래를 부르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레온타인은 음악 선생이 될 생각이었다. 적어도 선생이 되면 먹고는 살수 있으며 더구나 음악선생이면 마음대로 음악을 즐기며 지낼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온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찬성이었다. 그러나 레온타인은 마지막에 성악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레온타인은 우연히 위대한 흑인 베이스 폴 로브슨(Paul Robeson)의 자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폴 로브슨은 프라이스에게 성악가로서의 길을 걷도록 권고했다. 옆집의 후원자인 치스홀름씨가 학비를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프라이스는 뉴욕의 줄리아드에 장학생으로 입학할수 있었다. 줄리아드에서 레온타인은 훌륭한 스승인 플로렌스 페이지 킴벌(Florence Page Kimball)의 수제가가 되었다.  


레온타인의 첫 오페라 공연은 줄리아드 학생 오페라인 활슈타프였다. 레온타인은 미쓰 퀴클리(Miss Quickly)로 출연하였다. 마침 관객 중에는 작곡가 버질 톰슨(Virgil Thompson)이 있었다. 활슈타프 공연이 끝나후 버질 톰슨은 레온타인을 만나 자기의 3막 오페라 '네명의 성자’에 출연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이 오페라로서 레온타인은 미국 음악계의 인정을 받았다. 오페라에 발을 들여 놓은 레온타인은 마침내 거슈인의 ‘포기와 베쓰’에 출연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얼마후 레온타인은 유럽 순회공연을 가게 되었고 이 순회 여행에서 장래의 남편인 윌리엄 워필드(William Warfield)를 만나게 되었다(레온타인은 1972년 이혼하였다). 워필드는 포기역을 맡았던 베이스였다. 1955년 미국 NBC는 레온타인과 토스카 공연 계약을 맺었다. NBC가 흑인인 레온타인을 토스카로 선발하여 공연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자 당연히 여러 논란이 일어났다. 흑인이 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인 플로라 토스카를 맡을수는 없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났다. NBC는 공연은 하되 방송 중계는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태를 겨우 무마했다. 라디오 방송 홀에서의 프라이스의 토스카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프라이스가 프리마 돈나로서 본격적으로 오페라에 데뷔한 것은 1957년 플랑크의 ‘갈멜파 수녀와의 대화’였다. 레온타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이 공연에서 마담 리두앙(Lidoine)역할을 맡았다. 이듬해 레온타인은 허버트 폰 카라얀으로부터 아이다의 유럽 공연에 초청을 받았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의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그 이후 레온타인은 카라얀과 레코드 취입등 여러번 함께 공연을 가졌다. 카라얀과의 가장 유명한 공연은 1962년 잘츠부르크에서 있었던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였다. 1960년 5월 레온타인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아이다 공연을 가졌다. 밀라노에서 흑인이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프라이스가 최초였다. 이날의 아이다 공연에 대하여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쉴수 없는 감동의 순간들이었다’고 전했다. 이어서 가진 메트로에서의 일 트로바토레는 레온타인의 위대한 개선이었다. 관중들은 무려 42분 동안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것은 메트로 역사상 가장 긴 기립박수였다. 뉴욕 타임스의 음악 평론가 해롤드 쇤베르크(Harold Schoenberg)는 ‘미쓰 프라이스의 음성은 아름다운 그의 피부색처럼 윤택하다. 성량은 매우 풍부하였고 음색은 부드러웠다. 특히 저음에서 그러했다. 그의 노래는 아무런 흠이 없이 완벽했다. 특히 고음에서는 마치 벨베트와 같이 매끄러웠다’고 평했다. 메트로에서 인종장벽을 처음으로 깨트린 사람은 마리안 앤더슨이었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국제적 인종차별의 장벽을 깨트린 대스타였다. 메트로에서의 레오노라의 성공 이후 그는 메트로의 주역 소프라노로서 높은 인정을 받았다. 누군가 이런말을 했다. ‘어두운 무대위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노래가 차이를 말해줄 뿐이다.’ 레온타인이 메트로에서 가장 인기를 끈 오페라는 실상 사무엘 바버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였다. 레온타인은 클레오파트라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6년 메트로의 신관인 링컨 센터가 개관되었을 때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무대에 올려졌고 클레오파트라 역은 당연히 레온타인이었다. 프라이스는 메트로에서 신화를 창조한 인물이었다.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레퍼토리는 모차르트에서부터 푸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다. 그러나 가장 잘 어울리는 역은 아무래도 베르디였다.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메트로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1985년 아이다였다. 무대에서 은퇴한 레온타인은 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은퇴후 처음 가진 연주회는 2001년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9. 11테러 추모 음악회였다. 사람들은 레온타인을 기립박수로 환영하였다. 레온타인 프라이스는 뉴욕의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살고 있다.

 

 

 

  

 

 

 토스카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