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최고로 완벽한 디바 Leyla Gencer (레일라 겐서)

정준극 2008. 2. 27. 14:48

최고로 완벽한 디바 Leyla Gencer (레일라 겐서)

La Diva Durca(터키의 디바)

 


터키의 디바라는 별명의 레일라 겐서

 

소프라노 레일라 겐서는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성량과 신체적 조건과 용모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겐서는 1928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대 아나톨리아 왕가의 혈통을 지닌 귀족으로 모슬렘이었으며 가톨릭인 어머니는 폴란드 출신으로 리투아니아 귀족 가문의 후예였다. 그러므로 겐서에게는 동유럽과 아시아의 기질이 혼합되어있다. 겐서는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에 면하여 있는 어느 아름다운 궁전에서 살았다. 겐서는 이스탄불의 그리스철학원(Lyceum)에 다녔다. 겐서는 이 철학원에서 플라톤을 읽으면서 자신의 교양을 쌓아갔다. 그러나 겐서가 16세 때에 철학원에서 34세의 어떤 중년 폴란드 건축가를 알게 되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자 어머니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겐서를 철학원에서 빼내어 음악원에 보냈다. 겐서는 음악원에서 특이하게도 요가를 연마하여 호흡과 발성에의 연계를 모색하였다. 겐서는 놀랄만큼 높은 소리를 낼수 있었다. 하이 C를 넘어서 하이 F까지 소리를 냈다. 그러나 프랑스인 성악 선생은 중간 C 음 위의 A 음까지만 내도록 훈련시켰다. 어릴때부터 고음을 내기 위해 힘을 들이면 나중에 목에 이상이 생길수도 있다는 주장때문이었다.

 

앙카라국립오페라극장 정원에 있는 레일라 겐서 기념상


이스탄불 음악원을 나온 겐서는 홀란드(네덜란드)에서 열린 성악경연대회에 나갔지만 우승에 들지는 못했다. 겐서는 음악원에 다니던 때인 1946년, 22세 의 나이로 어떤 은행가와 결혼한 일이 있다. 겐서는 성미가 급했고 마음을 맞추기가 대단히 어려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은행가는 겐서를 사랑하여서 무던히도 참으며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다. 겐서는 음악원을 마친후 이탈리아로 가서 유명한 쟈니나 아랑기-롬바르디에게 레슨을 받았다. 그러면서 터키에서는 앙카라국립극장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겐서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50년, 그러니까 그가 22세 때에 앙카라에서 산투짜를 맡은 것이었다. 겐서를 사랑하고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아랑기-롬바르디가 이탈리아에서 겐서가 활동할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불행하게도 이듬해인 1951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겐서는 터키에 남아 있으면서 유명한 아폴로 그랑포르테(Apollo Granforte)에게 다시 사사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갔다. 얼마후 겐서는 이스탄불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마침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터키 정부의 고관들이 이 리사이틀에 참석하여 겐서의 노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후 겐서는 터키 정부의 공식 행사에 자주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불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티토 유고 대통령, 아데나워 독일 수상을 위한 공식 리셉션에서 노래를 불러 터키를 대표하였다.

 

레일라 겐서 오페라 하우스의 레일라 겐서 흉상

 

1953년 겐서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산투짜를 맡아 이탈리아 데뷔를 기록했다. 나폴리 데뷔는 터키에게 거의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터키 정부는 겐서가 해외에 나가서 공연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키 정부는 겐서가 항상 이스탄불에 있으면서 국빈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터키를 대표하여 노래를 불러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나폴리에서의 산뚜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미모와 연기, 그리고 드라마틱한 음성으로 오페라를 사랑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음해에 겐서는 또 다시 나폴리를 방문했다. 나비부인과 유진 오네긴에 주역으로 초청받아서였다. 역시 호평을 받은 공연이었다. 그리고 4년후인 1957년에는 라 스칼라에 데뷔하였다. 플랑크의 ‘갈멜파 수녀의 대화’ 세계 초연에서 마담 리두앙느(Lidoine)역을 맡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겐서는 라 스칼라가 가장 아끼는 소프라노가 되어 16년 동안 19개의 다른 역할을 맡으며 팬들에게 보석과 같은 아름다움을 선물했다. 겐서가 라 스칼라에서 맡은 주요 배역은 레오노라(운명의 힘), 엘리자베타 디 발루아(돈 카를로), 아이다, 레이디 맥베스(멕베스), 노르마, 오타비아(포페아의 대관식), 알체스테 등이었다. 그는 라 스칼라 무대에 올려진 피제티의 L'assassinio nella cattedrale의 세계 초연에서 켄터버리의 제1여인을 맡기도 했다. 겐서의 미국 데뷔는 195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였다. 대단한 성공이어서 그후 미국의 다른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메트에는 단 한번도 출연하지 않았다. 메트는 겐서에게 토스카를 부탁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앙카라의 '레일라 겐서 오페라 하우스'

 

겐서는 그의 전 경력을 통해서 도니제티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로 인정을 받았다. 도니제티의 작품중에서 겐서가 뛰어나게 해석했던 오페라는 Belisario(벨리사리오), Poliuto(폴리우토), Anna Bolena(안나 볼레나), Lucrezia Borgia(루크레치아 보르지아), Maria Stuarda(마리아 스투아르다), Caterina Cornaro(카테리나 코르나로)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겐서의 최고 출연작품은 1964년 나폴리에서의 로베르토 드브로(Roberto Devereux)였다. 겐서의 고음은 화려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겐서는 20여개에 이르는 벨칸토 역할 이외에도 70여개에 이르는 다른 역할도 소화하였다. 그 중에는 프로코피에프,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겐서는 잊혀진 오페라에도 적극 출연하였다. 스마레글리아(Smareglia)의 La Falena(라 팔레나), 로시니의 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영국여왕 엘리사베터), 스폰티니(Spontini)의 Agenese Di Hohenstaufen(호엔슈타우펜의 아게네세), 파치니(Pacini)의 Saffo(사포), 글룩의 Alceste(알체스테) 등이다. ‘갈멜파 수녀’가 라 스칼라에서 세계 초연될 때 겐서는 리두안의 역할을 위해 지휘자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a)의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겐서는 ‘파란 하늘’(O cieli azzurri)에서 하이 C 음을 피아니씨모로 불러 지휘자를 감탄시켰다. 지휘자 사바타는 당장 다음번 공연인 아이다에서 타이틀 롤을 맡기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지휘자 사바타가 얼마후에 병에 걸려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음악감독이 취임했다. 어느때나 그렇듯, 누구든지 음악감독으로 새로 취임하면 모든 것을 바꾸는 습성이 있다. 새로 취임한 음악감독은 사바타의 약속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안나 볼레나

 

겐서는 1985년 베니스의 La Fenice(라 페니체)에서 공연되었던 프란체스코 네코(Francesco Gnecco)의 La Prova di un Opera Seria  출연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오페라에서는 은퇴하였지만 1992년까지만 해도 간간히 연주회에는 출연하여 팬들을 감탄시켰다. 겐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라 스칼라에서 열심으로 후진들을 위해 그리고 극장을 위해 일하였다.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인 리카르도 무티는 겐서를 젊은 예술가를 위한 학교 책임자로 임명하기도 했다. 겐서는 1996년부터 조국인 이스탄불에서 ‘레일라 겐서 성악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젊은 유망주를 발굴하고 육성하였다. 제1회 수상자는 알바니아의 메조소프라노 엔켈레쟈 슈코사(Enkelejda Shkosa)로서 지금 슈코사는 유럽에서 초스피드로 각광 받고 있는 오페라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디바 중의 하나인 레일라 겐서는 2008년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터키 정부는 그를 기념하여 앙카라에 '레일라 겐서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했다. 겐서는 자기의 재산을 이스탄불에 있는 '이스탄불 문화예술 재단'(IKSV)에게 기증하였다. 이 재단은 이스탄불의 시샤네에 장소를 마련하여 겐서가 밀라노에서 생활했던 그대로를 재현하여 기념관으로 삼았다. '레일라 겐서 하우스'이다. 겐서는 평소에 잊혀진 오페라의 발굴과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도니체티와 로시니 등의 작품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겐서의 헌신적인 기여 때문이다.

 

 

 오타비아(포페아의 대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