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이적 바그너 소프라노 Lilli Lehmann (릴리 레만)
릴리 레만과 로테 레만을 혼동할 필요는 없다. 로테 레만이 40세나 아래이기 때문이다. 릴리 레만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바그너 소프라노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 리릭 콜로라투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보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고향이 프라하에서 가까운 뢰브(Löw)였기 때문이었다. 원래 성악가인 어머니 마리아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어릴때부터 친구였다. 그래서 릴리로서 바그너에 대한 친근감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릴리는 17세 때에 프라하에서 마적(Die Zaubeflöte)의 소년 역할을 맡았으며 그후 뛰어난 콜로라투라로서 ‘밤의 여왕’까지 맡아 촉망받는 소프라노로서 주목을 받았다. 프라하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릴리는 4년후 단지히와 라이프지히를 거쳐 베를린으로 진출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에서 마르게리트를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의 변신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폭이 넓어졌다.
1876년 릴리 레만은 바이로리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요청에 따라 ‘라인의 황금’에서 보글린데(Woglinde)와 발퀴레에서 오르트린데(Ortlinde)를 맡아 바그너 소프라노로서의 확실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사실 바그너와의 인연은 바그너가 어머니의 친구였다는 것을 떠나서 1863년 릴리가 15세일때 프라하를 방문한 바그너의 지휘로 노래를 불렀던 것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릴리는 프라하에서 바그너가 지켜보는 가운데 브륀힐데를 부른것도 큰 인연이었다. 릴리는 바이로이트 데뷔 10년후인 1886년에 메트로에 등장하여 골드마크의 ‘시바의 여왕’에서 술라미(Salamith)를 맡아 갈채를 받았다. 릴리는 메트로의 권유로 미국에 머물기로 작정하고 베를린 오페라를 떠났다.
1891년, 릴리 레만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당시 독일 황제인 빌헬름 II세의 간청에 의해서였다. 독일에 돌아온 릴리 레만은 오페라 무대나 콘서트보다는 후진 양성에 보다 힘을 쏟았다. 그의 제자 중에는 나중에 메트로의 여왕이 된 제랄딘 화라(Geraldine Farrar)가 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최고 해석자로 인정받은 비오리카 우르술레악(Viorica Ursuleac) 등이 있다. 릴리 레만은 훌륭한 음악선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주 경험과 발성기법에 대한 지식을 책으로 엮어냈다. ‘Meine Gesangkunst'(미국에서 이 책자를 How To Sing이라고 번역함)이라는 책이었다. 횡격막을 이용한 발성을 특히 강조한 내용도 포함되어있다. 릴리는 62세때에 오페라 무대를 은퇴하였으나 콘서트와 레코딩은 계속하였다. 유명한 평론가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은 릴리에 대하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적 성악가였다‘라고 말했다. 그의 가정생활은 비교적 평온한 것이었다. 그는 1888년 테너 파울 칼리슈(Paul Kalisch)와 결혼하였으나 성격차이로 헤어졌다. 릴리는 채식주의자였으며 사교적이었고 동물들을 사랑했다. 그는 동물학대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릴리 레만은 192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 중에 하나는 ‘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예술은 너무나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짧다’였다.
이졸데 브륀힐데
릴리 레만의 저서 HOW TO 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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