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최후의 진정한 콜로라투라 Lina Pagliughi (리나 팔리우기)

정준극 2008. 2. 27. 14:54
 

▒ 최후의 진정한 콜로라투라 Lina Pagliughi (리나 팔리우기)


20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진정한 콜로라투라인 리나 팔리우기는 1907년 뉴욕의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뉴욕에서 제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리나의 아버지는 리나가 태어난지 1년반후에 샌프란시스코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전보다 나은 것이었다. 그 때문에 리나는 정상적인 공부를 할수 있었다. 리나 팔리우기는 타고난 소프라노였다. 그는 이미 일곱 살때에 리사이틀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마침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당대의 유명한 소프라노 루이자 테트라치니(Tetrazzini)가 리나의 노래를 듣고 그에게 본격적인 공부를 하라고 적극 권장했다. 사실 테트라치니는 리나를 양녀로까지 삼을 생각이었지만 리나 부모가 거절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리나의 부모와 친지들은 리나에게 음성은 이미 타고난 것이므로 우선 피아노를 공부하도록 주선하였다. 어린 리나 팔리우기는 10대 초반부터 샌프란시스코음악원에 들어가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악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15세 때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테트라치니의 주선으로 유명한 성악교사 만리오 바바뇰리(Manlio Bavagnoli)에게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리나와 테트라치니는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리나는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음악공부를 거의 마쳤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의 수업은 주로 현실적인 사항에 집중되었다.


리나가 이탈리아에 온지 몇 년후 리나를 대단히 아껴하던 테트라치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리나 팔리우기는 그를 추모하여 테트라치니가 얼마나 따듯한 인간마의 소유자이며 음악에 대하여 높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팔리우기는 테트라치니가 평소에 마리아 칼라스에 대하여 건방지고 못된 여인이라고 주장했던 내용도 함께 동조하였다. 팔리우기는 17세때에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밀라노에서 질다(리골레토)를 맡은 것이었다. 팔리우기는 놀라운 콜로라투라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어 그는 라 스칼라에 스카웃되어 당시 인기를 끌었던 토티 달 몬테(Toti dal Monte)를 제치고 주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팔리우기는 리릭 소프라노 역할은 전혀 맡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콜로라투라를 유지하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감미로운 음성을 가지고 있으며 높은 음을 잘 내는 예쁜 아가씨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체르비네타, 또는 ‘밤의 여왕’처럼 빠르고 경쾌하게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좀더 다른 무언가를 해냈던 소프라노들이 있었다. 색채가 있는 음성과 함께 파싸지(노래의 소절)를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소프라노들이었다.


이들은 파싸지를 리릭과 드라마틱으로 구분하여 표현할줄 알았다. 이들은 고음에 있어서 하이C를 뛰어 넘어 하이E, 또는 하이F 까지도 두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설득력 있으면서도 아름답게 낼수 있었다. 그러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는 존타크(Sontag), 제니 린드, 아델리아 패티, 젬브리히(Sembrich), 넬리 멜바, 루이자 테트라치니, 갈리-쿠르치, 그리고 이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리나 팔리우기가 있다. 이런 스타일의 소프라노들은 로시니-도니제티-벨리니-마이에르베르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레퍼토리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벨리니-도니제티-로시니보다는 현대작품에 관심을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콜로라투라를 필요로 하는 오페라 무대는 안타깝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더구나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고난도의 기교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콜로라투라를 힘들게 마스터하기 보다는 리릭을 선호하는 편이어서 진정한 콜로라투라는 점점 희소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나 팔리우기야 말로 이 시대 최후의 진정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리나 팔리우기(이름이 무얼 팔린다는것 같아 좀 이상하지만 어쩔수 없음)는 질다로서 데뷔하여 갈채를 받았고 이어 미미를 맡아 역시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기의 음성이 리릭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지만 리릭보다는 콜로라투라 레퍼토리에 집중키로 마음먹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음성을 드라마틱으로 유지하는데 노력하였으며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자기의 음성을 연마하고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비올레타를 들수 있다. 그는 비올레타를 가벼운 리릭으로 시작했지만 막이 지날수록 무거운 드라마틱으로 변하여 부르는 놀라운 테크닉을 구사하였다. 팔리우기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팔리우기는 언제나 다른 성악가들을 존경하고 격려하였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곧바로 팔리우기에게 되돌아 오는 것이어서 그는 오래동안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지냈다. 1938년, 그는 코벤트 가든에서 질다를 불렀다. 이 공연은 레코딩되었으며 팔리우기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질다였다는 평을 받았다. 팔리우기는 미모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운 입장이다. 그저 평범하고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음반에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듣는 것이다. 팔리우기가 남긴 질다와 로지나, 비올레타는 전설적인 것이 되어있다. 1940년대 초,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Snow White)가 이탈리아판으로 제작되었을 때 영화속의 노래를 더빙한 사람이 바로 팔리우기였다. 그는 1957년 50세때에 무대에서 은퇴하였으며 그후 이탈리아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다가 73세를 일기로 1980년 10월 1일 루비코네(Rubicone)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진정한 콜로라투라를 잃은 슬픔에 젖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