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스카니니가 감동한 Lina Bruna Rasa (리나 브루나 라사)
1984년 10월 밀라노의 어느 쌀쌀한 날, 슬픔에 젖은 몇 사람들이 거의 40년을 정신요양소에서 고독하게 격리되어 살았던 한 여인을 땅속에 묻기 위해 초라한 관을 따라가고 있었다.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 겨울비가 내리는 날 모차르트의 장례식 행렬을 보는 것과 같다. 한때 세계 유명 오페라극장의 무대를 압도하였던 프리마 돈나 리나 브루나 라사의 장례였다. 리나라는 이름은 베리스모(Verismo)라는 단어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리나는 그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찬사를 받았던 전설적인 베리스모 소프라노였다. 리나는 마스카니와 토스카니니가 가장 아꼈던 소프라노였다. 리나는 마스카니의 네로네(Nerone) 세계초연에서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역사상 위대한 오페라 아티스트들중 어떤 사람들은 비극적 운명 때문에 그들의 경력을 일찍 끝내야했다. 프랑스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마도 로뱅(Mado Robin)은 이러한 내키지 않는 관례의 테이프를 끊은 사람이라고 할수 있으며 바로 리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근자에는 마리아 칼라스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리나 브루나 라사는 1907년 9월 24일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에서 태어났다. 14세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한 그는 점차 성악적인 완성과 함께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거의 본능적인 연기력이 가미되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리나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한 선생들은 리나를 설득하여 베니스의 라 훼니스(La Fenice)극장에서 라 조콘다에 출연토록 했다. 이 때 리나가 부른 Suicidio는 라 훼니스에서는 유례가 없는 장시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가 불과 17세 때였다. 그해 가을 리나는 제노아에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에 출연하였다. 이 오페라에서 리나가 맡은 역할은 엘렌(트로이의 헬렌)이었다. 타이틀 롤은 유명한 베이스 에치오 핀자(Ezio Pinza)였다. 17세의 젊은 나이로 마리아 잠보니(Maria Zamboni), 줄리오 로톤디(Giulio Rotondi), 그리고 에치오 핀자와 같은 거장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범한 일이었다. 메피스토펠레에서의 엘렌으로 리나는 기는 곳마다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 토리노에서의 메피스토펠레는 리나의 명성과 경력을 확실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1926년 10월, 성직자이며 작곡가인 레피체(Refice)가 오랫동안의 고생 끝에 오페라면서 오라토리오인 ‘성 프란체스코’ 3부작을 완성하여 성자의 고향인 아씨시(Assisi)에서 첫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작곡가 레피체는 리나에게 성 클라라(St. Clara)를 맡아 줄것을 특별히 청탁하였다. 원래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리나는 진정한 종교적인 열정으로 거의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의 노래와 연기를 보여주었다. 작곡가 레피체는 리나 브루나 라사보다 더 위대한 성악가는 이 세상에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듬해인 1927년 1월, 리나는 이집트의 초청으로 카이로의 왕립극장(Teatro Reale)에서 아이다를 맡아하였다. 이집트 전국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공연이었다. 이어 다음 달에는 부티(Butti)의 오모니지아(Omonizia)를 불렀다. 이집트는 이 젊은 이탈리아 여인으로 인하여 열광에 빠졌다. 리나는 몇달동안 이집트에 머물며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열광적인 찬사와 함께 오페라에 출연했으며 그후 프랑스의 로잔느로 가서 처음으로 산뚜짜와 레오노라(일 트로바토레)를 불렀다. 리나의 산뚜짜는 그야말로 화산이 폭발하듯, 노도 광풍이 몰려오듯, 그러면서 깊이를 모르는 심연의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진실한 공연이었다. 그해 10월, 리나는 19세의 젊은 나이로 대망의 라 스칼라에 데뷔하였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였다. 리나에 대한 기립박수는 그칠줄을 몰랐다. 공연이 끝나자 토스카니니는 직접 펜과 종이를 들고 리나에게 다가와서 다음해 봄까지 라 스칼라에 머물러 있겠다는 계약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28년 리나는 라 스칼라에서 안드레아 셰니에의 타이틀 롤을 맡아 불렀다. 마지막 장면의 Vicino a te가 끝나고 후주가 연주되고 있었지만 관중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리나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수 소리는 점점 커져서 마치 크레센도처럼 울려퍼졌다. 지휘자 에토레 파니짜(Ettore Panizza)는 허공을 지휘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신문들은 박수 소리가 너무 커서 오케스트라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마스카니와 리나가 처음 만난 것은 1928년 7월 베니스에서였다. 작곡자 마스카니의 지휘로 산 마르코(San Marko) 광장에서 공연된 카발레리아에는 약 4만명이 관중이 몰려온 대성황이었다. 주인공인 산뚜짜는 리나였다.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마스카니는 젊은 리나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스카니는 리나가 자기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소프라노라면서 존경을 보냈다. 이어 마스카니는 자기의 고향 극장인 리보르노(Livorno)의 골도니(Goldoni)에서 공연하는 이사보(Isabeau)의 리바이벌에 리나를 특별 초청하여 타이틀 롤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리나의 이사보는 실패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형편없이 불렀던 것이다. 리나는 곧 다른 소프라노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리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있는 마스카니는 자기의 고향에서 리나가 최고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스카니는 극장측에 얘기하여 이사보를 중단하고 카발레리아를 공연토록 했다. 엄청난 성공이었다. 리보르노는 밤새도록 리나의 이름을 외치는 군중들의 행렬로 거리가 메어질 정도였다. 전설은 시작되었다.
1929년 리나는 남미를 방문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에서 토스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그리고 안드레아 셰니에를 공연하였다. 안드레아 셰니에에서는 조르즈 틸(Georges Thill)이 상대역이었다. 남미에서 리나는 레스피기(Respighi)의 Compana Somersa의 초연에도 출연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 등 남미에서 리나에 대한 갈채는 놀라울 정도였다. 관중들은 리나의 모습만이라도 보기 위해 며칠이라도 극장 앞에서 밤을 지샜다. 그러나 남미에서의 공연은 리나의 고별 공연이기도 했다. 이후 리나는 아르헨티나는 물론 남미의 어느 곳에도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리나는 볼로냐와 밀라노에서 데스데모나, 콤파나 솜메르사, 비너스(탄호이저, 엘리자베트 역할은 지나 시냐), 윌리엄 텔 등에 출연하여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 중에서도 라 스칼라는 리나의 독무대였다. 리나는 안드레아 셰니에로 몇해 동안 만나지 못했던 팬들을 다시 집결시켰다. 그후 리나는 유럽의 여러 곳에서 토스카, 산뚜짜, 라 왈리, 로렐라이, 데스데모나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차지하였다.
리나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사다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리나는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그리고 여인으로서 모든 행복을 지니게 되었다. 그가 묵는 호텔 방에는 꽃다발로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늦은 1931년부터, 즉 리나가 23세 때부터 어쩐 일인지 그는 급격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예정된 공연을 취소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되자 로마, 나폴리 등의 오페라 극장들은 리나와 출연 계약을 맺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듬해인 1924년 리나는 라 스칼라에서만 한 차례의 산뚜자를 공연하였고 팔레르모에서는 레오노라(운명의 힘)을, 플로렌스에서 엘렌(메피스토텔레) 등 몇 군데에서 무대에 섰을 뿐이었다. 마스카니가 리나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스카니는 리나가 브레스키아, 노바라, 피사 등지에서 이사보와 산뚜짜를 맡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리나의 건강상태는 호전될 줄을 몰랐다. 피사에서 마스카니 지휘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공연할 때에 리나는 무대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여 제대로 노래를 부를수 없게 되었다. 피사에서는 세 번 공연이 계획되어있었다. 마스카니는 세 번째 공연의 바톤을 다른 지휘자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리나로서도 마스카니가 지휘를 맡을 때까지 버티면서 무대에 출연한 것으로 겨우 보답하였다. 이듬해인 1933년 리나는 파르마에서 아이다를 맡는 등 간헐적인 활동을 했고 마스카니와 함께 산 레모(San Remo)에서 산뚜짜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카프리에서 아이다를 맡았을 때 동료 출연자들은 리나가 간혹 심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자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나는 토리노와 로마에서 여덟 번의 공연을 더 했다. 모두 마스카니의 지휘아래였다. 말하자면 마스카니가 지휘할 때만은 리나가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마스카니는 그런 리나를 계속 코치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1934년 8월, 마스카니는 우울증에 걸린 리나를 설득하여 시실리의 작은 마을인 노토(Noto)에서 카발레리아의 공연에 출연토록 했다. 노토에서 리나는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몇 년전의 그 모습으로 산뚜짜를 불렀다. 관중들은 환호하였고 마스카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상기되어 리나의 재기를 기뻐하였다. 그후에 가진 바리(Bari)에서의 토스카 공연도 대단한 성공이었다. 마스카니는 리나가 이제 온전하게 된 것으로 믿었다. 시실리에서 돌아온 마스카니는 그의 또 다른 걸작인 네로네(Nerone)를 완성하고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대규모 공연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무쏠리니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무쏠리니는 로마의 대규모 군중들이 모인 곳에서 공연하지 말고 로마의 다른 극장에서 공연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스카니는 네로네를 라 스칼라에서 공연키로 결정하였다. 마스카니는 프리마 돈나로서 리나를 선택하였다. 공연도중 무대에서 혹시 정신질환이 재발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마스카니의 선택은 성공이었다. 밀라노의 평론은 마스카니와 리나에게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러던중 1935년, 리나가 27세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리나는 슬픔이 어느정도 가신듯 무대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다. 제노아 등에서의 공연 스케줄을 잡게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리나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너무 심하여 도저히 무대에 설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리나는 제노아의 네로네 공연을 취소하였다. 마스카니가 출연료를 얼마든지 주겠으니 제발 무대에 나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리나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음달에는 갑자기 생기가 되돌아 온듯, 리나는 라 스칼라, 페사로 등에 출연하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아무도 모르게 반년 이상이나 사라져 버렸다. 리나는 자기의 능력에 대하여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종의 좌절감이었다. 동료들은 그런 리나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느라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리나는 다시 회복하여 라 스칼라에서 산뚜자와 토스카를 맡았다. 그리고 마스카니와 함게 마스카니의 고향인 리보르노에서 산뚜짜를 공연하였다. 리보르노의 관중들은 리나가 연약해 진것을 잘 알고서 무한한 격려를 보내주었다. 관중들은 매번 공연 때마나 기립박수와 함께 리나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그해 12월, 리나는 주위의 설득을 받아들여 로마에서 네로네에 출연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리나의 정신적 압박감은 도저히 참기 어려울 정도로변해갔다. 리나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로에서 네로네의 나폴리 초연을 약속했지만 그 영광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6월, 리나는 카스텔 산 조반니(Castel San Giovanni)의 카사 델 파치오(Casa del Pascio)에서 토스카를 불렀다. 파치오(Pascio)는 파치스트의 본부라는 의미이다. 이 공연에는 파치스트의 거물들이 모두 모였다. 리나가 Vissi d'arte를 부르고 나자 열광적인 박수가 터졌다. 인사를 마친 리나는 가슴에 감추어둔 이탈리아 국기를 꺼내 들고 두 손으로 높이 들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기념비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리나의 애국심을 찬양하였지만 동료들은 리나의 정신상태가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7월과 8월에 리나는 이탈리아 8개 소도시를 산뚜짜로서 순회공연하였다. 이 기간동안 리나는 마치 혼미한 상태 속에서 공연하는 것 같았다. 그는 무대에 올라오면 자기도취와 같은 일종의 황홀경에 빠져 무아지경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때쯤하여 리나가 자실을 기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느때 공연 도중 오케스트라 피트에 몸을 던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오랜 침묵기간이 지난 1928년, 리나는 크레모나(Cremona)의 폰키엘리 극장에서 산뚜자를 공연한 일이 있다. 이 공연을 본 리나 팔리우기(Lina Pagliughi)는 ‘아직도 리나의 산뚜짜를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였다. 그만큼 리나는 무대위에서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였다. 8월 1일, 리나는 리나는 로마의 카라칼라(Caracalla)에서 1만5천여 관중이 모인 가운데 마스카니 지휘의 이사보에 출연하였다. 오래만에 보는 대성공이었다.
1940년, 카발레리아 초연 50주년을 기념하여 마스카니는 리나와 함께 베니스, 로마, 트리에스테, 제노아, 밀라노, 나폴리, 플로렌스, 리보르노에서 공연을 가졌다. 리나의 상대역은 베냐미노 질리였다. 모든 공연은 1주일 전에 완전 매진되었다. 리나의 공연은 확신과 집념에 넘쳐있는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리나는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리나는 1942년 중반까지 간헐적으로 산뚜짜와 토스카를 불렀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극장에서였다. 시골에서 공연할 때마다 마스카니는 리무진을 리나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 보내어 극장까지 모시도록 하고 공연이 끝나면 다시 호텔로 모셔오도록 주선해 주었다. 혹시 리나가 공연후에 호텔로 가는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른다고 걱정해서였다. 죠반니 브레비아리오(Giovanni Breviario)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불쌍한 리나는 이미 상태가 나빴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음성은 무대에 올라가기가 무섭게 생생히 살아났다. 이러한 기적은 무대에서만 일어났다. 우리 모두 그러한 리나에게 한없는 사랑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아주 소극적이고 냉담하며 무관심하였다.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들과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았으며 핸드빽만 꽉 붙잡고 있었다.’
1942년, 34세 때에 그는 페사로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야외극장에서 산뚜짜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마지못해 무대에 섰다. 그것이 마지막 무대 공연이었다. 신문들은 위대한 아티스트에 대한 생생한 회상을 할수 있는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그후 리나는 때때로 밀라노 부근의 정신요양소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인 1945년 마스카니가 세상을 떠났다. 리나에게는 마스카니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몇 년후인 1948년, 리나는 건강이 좋아진듯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주장했다. 그해 7월, 부스토 아르치시오(Busto Arzisio)에 무대가 마련되었다. 토스카니니는 그토록 사랑스럽던 리나의 연주를 보기위해 밀라노에서 부스토 아르치시오를 찾아왔다. 극장을 떠날 때 토스카니니의 뺨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래를 부르겠다는 그 집념에 감동해서였다. 10월에 리나는 지방 순회 연주회를 가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한두차례 열린후에 끝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리나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도중 더 이상 가사와 멜로디를 기억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안타깝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리나를 거의 강제적으로 무대에서 데려나왔다. 이후 36년동안 리나는 밀라노의 정신요양소에서 고독과 싸우며 생존해 왔다. 리나는 과거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리나의 존재는 서서히 사라졌다. 다만 몇 명의 동료들이 그를 찾아가 날씨가 좋으면 차에 태워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했을 뿐이었다. 리나는 그렇게 하여 77세로 정신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8년 10월 어느날, 리나의 장례식이 쓸쓸하게 치루어졌다. 마스카니와 토스카니니를 감동시켰으며 무쏠리니까지 감동시켰던 당대의 프리마 돈나 리나는 밀라노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훗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우리도 리나와 별다를 바가 없다. 우리도 모두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산뚜짜(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리나 브루나 라사가 취입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음반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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