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마 수퍼스타 Lucine Amara (루신느 아마라)
하르모니아(Harmonia)오페라단의 명예회장인 루신느 아마라는 ‘아메리카 성공 스토리’이다. 아마라라고 하면 곧바로 메트로라를 연상할수 있을 정도로 아마라-메트로는 같은 뜻의 단어가 되었다. 아마라는 메트로의 House Soprano였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메트로 터주대감이다. 아마라는 무려 41년동안 메트로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프리마 돈나였다. 그의 우아한 무대 등장은 그의 한없이 사랑스러운 여성스러움과 합하여 찬란한 메트로의 무대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는 이른바 ‘메트로의 황금시기’를 장식했던 가장 뛰어나고 가장 사랑을 받은 스타중의 스타였다. 그의 음성은 따듯함이 넘쳐흐르는 것이었으며 말로 형언할수 없을 정도의 특별한 아름다움, 그리고 신비스러운 호소력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단순간에 사로잡는 것이었다. 아마라는 어떠한 역할이든지 훌륭하게 소화할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경력을 통하여 오페라의 56역할을 맡아했다. 관중들이 아마라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위해 어떤 오페라든지 모두 출연해 달라고 요청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역할은 아이다, 나비부인, 카르멘의 미카엘라, 미미, 팔리아치의 네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등이며 가장 뛰어난 역할은 아무래도 알마비바 백작부인(피가로의 결혼)이었다. 그의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아름다운 모습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아마라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러면서도 ‘운명의 힘’의 레오노라에서처럼 드라마틱한 면도 보여주었다.
아마라는 1950년 돈 카를로 공연에서 ‘천상의 음성’(Celestial Voice)을 맡아 메트로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바로 그 날은 전설적인 루돌프 빙이 메트로의 음악총감독으로 취임한 날이었지만 루돌프 빙은 장차 메트로를 빛나게 만들어줄 가장 위대한 디바인 아마라가 메트로에 있는지도 몰랐다. 아마라의 성공 스토리는 마치 동화와 같다. 그는 아르메니아인의 후손으로서 1927년 코네티컷트 주 하트포드의 중산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부모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온 그는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공부하였으나 나중에는 성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성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떤 음악학교에서 7년동안 성악을 공부한후 생활비를 벌기위해 곧이어 샌프란시스코오페라단에 콘트랄토(!) 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합창단의 일원으로서 농촌부인 역할이나 집시 역할정도만을 맡는 것은 원래의 목표가 아니었다. 아마라는 합창단을 그만 두고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 글린드본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인 칼 에버트(Carl Ebert)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아마라는 메조소프라노로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타이틀 롤과 앨버트 헤링의 레이디 빌로우스를 맡게 되었다. 거의 같은 때에 프랑스의 유명한 지휘자 피에르 몽토(Pierre Monteux)가 아마라의 노래를 듣고 나서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과의 콘서트 데뷔를 주선해 주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치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차근차근 나타났던 것이다. 더구나 피에르 몽토로 말하자면 당시 미국과 유럽의 음악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대단한 인물로서 아마라의 경력에도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1950년 아마라는 메트로의 음악총감독인 루돌프 빙의 앞에서 오디션을 치루게 되었고 이 오디션에 합격하여 메트로와 전속계약을 맺게 되었다. 첫 시즌에 아마라는 벨군데(Wellgunnde)와 이네스(Inez)를 맡았다. 다음 시즌에는 아이다의 최고여사제를 불렀다. 그러다가 팔리아치의 네다를 맡게 되었다. 아마라는 네다를 38회 연속 공연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었다. 후에 그는 팔리아치 전편을 두 번이나 레코딩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코 코렐리가 카니오를 맡았고 두 번째에는 리챠드 터커가 카니오를 맡았다. 1952년 그는 카르멘의 미카엘라를 맡게 되었다. 뛰어난 미모와 순수하고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아마라는 최고의 미카엘라로서 최대의 찬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미카엘라로서 단 하루만에 세계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의 스토리는 다 아는 대로 역사, 그 자체였다. 보스턴 글로브은 ‘아마라는 한마디로 대단하다. 그는 찬란함만으로 노래부른 것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노래를 불렀다. 아마라의 액팅에 대하여는 오로지 찬사만 보낼뿐이다. 그는 음성과 열정을 하나로 단단히 융합된 연기로 표현하였다’라고 썼다. 타임지는 ‘아마라의 등장으로 메트로는 찬란함을 되찾았다’고 전했다. ‘크리스쳔 사이언스 모니터’지가 가장 정확한 표현을 했다. ‘우리는 오페라 주인공의 성격묘사가 얼마나 깊이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라고 썼다. 런던 타임스는 아마라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리릭 소프라노’라고 선언하였다. 아마라가 세계 각국의 오페라 무대에 등장할때마다 찬사는 줄을 이었다. 아마라는 이제 진정한 프리마 돈나가 되었던 것이다.
아마라는 메트로에 합류한후 882회의 무대 출연을 했고(다른 무대에서의 공연을 합하면 통산 1천회가 넘는다) 새로운 제작의 작품에 9회나 등장하였다. 그는 56개의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아서 공연했으며 수없이 많은 콘서트, 리사이틀, 라디오 방송 출연을 했다. 아마라는 미국내 33개 오페라극장의 무대에 출연하였으며 25개 교향악단과 협연하였다. 아마라는 세계 25개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으며 조국인 아르메니아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러시아 등지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아마라는 미국 국무성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고서 소련을 방문할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였다. 아마라가 아르메니아를 처음 방문하였을때 아르메니아는 마치 국경일과 마찬가지였다. 연주회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아마라의 얼굴이라고 보려고 밤새 호텔 문밖의 길거리에서 장사진을 치고 기다렸다. 아마라가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였을 때 모든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도록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아마라는 마리오 란자와 함께 영화 ‘위대한 카루소’에도 출연하였다. 그후 아마라는 상당히 많은 레코딩을 하였다. 루신느 아마라에 대하며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타임지가 쓴대로 그는 ‘수퍼스타’였다. 단순한 수퍼스타가 아니라 메트로를 유명하게 만든 수퍼스타이며 세계를 열광시킨 수퍼스타였다. 무대에서 은퇴한 그는 현재 여러 곳에서 오페라 클라스를 열어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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