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이탈리아 최후의 베리스모 Magda Olivero (마그다 올리베로)

정준극 2008. 2. 27. 15:20

이탈리아 최후의 베리스모 Magda Olivero (마그다 올리베로)


마그다 올리베로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베리스모 소프라노이다. 베리스모 소프라노는 두 유형으로 나눌수 있다. 가냘프고 연약한 젊은 여인의 좁은 듯하지만 빛나는 음성, 그리고 열정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폭이 넓으면서도 어두운 음성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처음의 경우는 비올레타이며 두 번째 경우는 산투짜라고 할수 있다. 올리베로의 음성은 처음엔 연약하여 상처받기 쉬운 여인의 음성이었으나 나중에는 온갖 시련을 이겨낸 성숙한 여인의 음성으로 변하였다. 올리베로는 칠레아(Cilea)의 역할에서부터 다른 베리스모 작곡가의 작품에 적합한 소프라노였다. 아마도 그러한 배경을 가진 오페라 아티스트는 올리베로로서 마지막일 것이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아무런 매력이나 특성이 없는 전천후 음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올라베로는 영혼으로 베리스모를 부른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만일 칼라스와 올리베로 중에서 누구를 택할 것이냐고 한다면 올리베로’라는 얘기까지 공공연히 나왔었다. 왜냐하면 올리베로가 더 따듯하고 깊이가 있으며 더 감동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984년 미국의 CBS 라디오는 Opera Fanatic(오페라 팬)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소프라노’라는 순서를 진행한 일이 있다.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로서는 칼라스, 폰셀레, 그리고 올리베라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소프라노’에서는 1위에 몽세라 카바예, 2위에 마그다 올리베로였다. 올리베로는 두개의 프로그램에서 모두 해당되는 유일한 성악가였다.

 

아드리아나 르쿠브러에서의 마그다 올리베로


마그다 올리베로는 1910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부근의 살루쪼(Saluzzo)에서 태어났다. 올리베로는 이탈리아의 성악가들이 대체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 출신인데 비하여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명망 있는 판사였다. 그래서 올리베로는 어릴 때부터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명한 작곡가인 죠르지오 게디니(Giorgio Ghedini)에게서 피아노, 화성법, 대위법을 배웠다. 카스트라토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성악가들은 기본적인 음악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후, 대부분 이탈리아 성악가들은 음악이 아닌 성악만을 배웠다. 올리베로는 무용도 배웠다. 나중에 그가 한창 활동할 때에 아르만도 라 로사 파로디(Armando La Rosa Parodi)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을 때, 올리베로는 춤을 추며 유혹하는 장면에서 발레리나로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춤을 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악가로서 그는 대단히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올리베로는 어느해 이탈리아 라디오의 오디션에 나간일이 있다.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소리가 없다. 음악성도 없다. 개인적은 특성도 없다. 이 여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직업을 바꾸어야 할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리베로는 어떤 영향력있는 인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올리베로의 주장에 따라 다시 한번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두 번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심사위원중 한 사람이었던 루이지 게루씨(Luigi Gerussi)가 ‘내가 한번 이 아가씨를 가르쳐 보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시간 낭비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오!’라고 대꾸해 주었다. 아무튼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올리베로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벌써 세 번이나 레슨 선생님을 바꾸었는데...아버지에게 또 뭐라고 그러나?’라는 걱정을 했다. 아버지는 ‘만일 성악 공부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피아노로 바꾸어야 된다’고 주장해 왔다. 아무튼 올리베로는 ‘기왕에 성악에 뜻을 두었으니 다시 해 보자!’라는 다짐으로 게루씨 선생을 따라나섰다. 게루씨 선생은 정말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올리베로가 눈물을 흘린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게루씨 선생은 ‘내 앞에서 못하겠다 라는 말은 입밖에도 꺼내지 마라! 그런 단어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니라! 필요하다면 나는 네가 죽어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겠다. 그러니까 죽더라도 나중에 죽어라! 그전에 우선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소리쳤다. 그후 올리베로는 죽어라고 공부했으며 특히 호흡법에 대하여는 죽을 힘을 다해 배웠다.

 


 

그는 1932년 토리노 라디오에 테너 니로 카토쪼(Nino Cattozzo)와 함께 출연하여 오페라 아티스트로 데뷔하였다. 이듬해 올리베로는 토리노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Vittorio Emanuele)극장에서 리릭 소프라노로서 자니 스키키의 로레타를 맡았다. 그후 몇 년동안 올리베로는 이탈리아 전역의 유명 오페라극장에서 볼수 있었다. 그는 1938년 처음으로 아드리아나를 공연했다. 상대역은 베냐미노 질리였다. 1940년 그는 라벤나(Ravenna)에서 아드리아네(Adriane)를 마지막으로 공연한후 결혼하여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소프라노였지만 정작 활동 기간은 7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10년후인 1950년, 작곡자 프란체스코 칠레아의 특별 요청으로 다시 아드리아나를 맡아 공연했다. 놀라운 것은 10년이란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성과 연기는 더욱 완숙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세계 오페라 무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1975년, 메트로에서의 토스카는 특별히 기억될만한 것이었다. 올리베로의 정식 무대 은퇴는 1981년 베로나에서 플랑크의 ‘인간의 소리’(Ka voix humaine)를 맡은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한 역할이기도 했다. 그때 상대역은 플라치도 도밍고였다.


마그다 올리베로의 대표적인 역할은 훼도라, 미니(황금 서부의 아가씨), 마르게리트(메피스토펠레), 미미, 나비부인, 마농 레스코, 토스카 등이다. 모두 베리스모의 대표적인 주인공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베리스모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베르디의 비올레타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마지막 레코딩은 1993년 이탈리아에서 역시 아드리아나였다. 그의 나이 83세! 마치 그의 유언이 담긴듯한 레코딩이었다. 마그다 올리베로는 2014년 9월 8일 밀라노에서 향년 104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니(황금 서부의 아가씨)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토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