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 슈트라우스의 여신 Maria Jeritza (마리아 예리차)
합스부르크 제국의 막바지에 태어난 마리아 예리차는 뛰어난 소프라노이며 오페라 연기자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특별히 예리차를 숭모하였다. 예리차는 1919년 10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있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부인’의 세계 초연에 여왕으로 출연했다. 이어 살로메,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이집트의 헬렌’의 세계 초연에 주역을 맡았으며 ‘장미의 기사’ 세계 초연에서는 옥타비안을 맡았다. 푸치니는 예리차가 토스카와 ‘황금 서부의 아가씨’에서 미니를 공연한 것을 보고 대단히 감격했다. 푸치니는 예리차를 염두에 두고 투란도트를 작곡했다고 한다. 예리차는 예누파(야나체크)의 비엔나 초연에서도 완벽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예리차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오페레타에서도 눈부신 역할을 맡아 하였다. 예리차는 폭넓은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뛰어난 춤 솜씨로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마리아 예리차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늘씬하게 큰 키에 은빛이 섞여있는 금발의 머리칼, 그리고 푸른 눈동자의 매력적인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예리차는 일반 대중에 대한 자기 관리에도 무척 신경쓴 여성이었다. 예리차에게 있어서 신문 인터뷰를 통하여 자기의 음악관과 인생관을 얘기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언젠가는 그가 어떻게 해서 아름다운 팔꿈치를 유지하는지에 대한 비결을 신문에 공개한 일도 있다. 매일 신선한 그레이프 프루트 주스에 팔꿈치를 담근다는 얘기였다. 비엔나의 사교계에서는 너도나도 그레이프 프르트 주스에 팔꿈치를 담그는 것이 유행했었다. 1930년대에 예리차는 몇 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예리차가 출연한 영화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스럽고 활기에 넘친 노래에 매혹 당하였고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였다. 예리차는 레코드 취입이 가능한 당시였지만 고작 한두장의 음반만을 남겨 놓았다. 1923년부터 1937년까지의 음반을 들으면 그가 최고의 전성시대에 취입한 것이지만 ‘별로...’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이에 대하여 예리차는 ‘레코드 취입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움직이기도 어려운 좁은 방에서 마이크에 신경 쓰며 레코딩하는 것은 고역이었지요. 오케스트라도 그 좁은 방에 함께 몰려 있어서 매우 불편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리아 예리차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륀(Brünn)에서 태어났다. 브륀은 현재 체코의 브르노(Brno)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마리아 예들리츠카(Jedlitzka)였다. 예리차는 브르노 음악원을 나와 시립극장의 단원이 된다. 그의 아름다움, 성악적 재능, 무대에서의 연기력은 당장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어 그는 비엔나 폴크스오퍼(Volksoper)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1912년, 세계1차 대전이 일어나기 얼마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셉(Franz Joseph) 황제가 예리차의 공연을 보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쇤부른(Schönbrunn) 궁전의 황실오페라에 출연토록 요청한다. 그리하여 예리차는 합스부르크 왕실의 프리마돈나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영국, 스웨덴, 덴마크, 헝가리, 러시아의 오페라극장에서 열화와 같은 초청을 받는다. 그리고 1921년부터 32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에는 미국 메트로에서 프리마돈나로서 이름을 떨친다. 1921년 예리차의 메트로 데뷔는 에리히 코른골트(Erich Korngold)의 ‘죽은 도시’(Die Tote Stadt)의 세계 초연이었다. 헐리웃 영화음악의 최고 작곡가이기도 한 코른골트는 예리차를 위해 오페라 ‘죽은 도시’를 작곡했다. 코른골트는 Violanta와 Das Wunder der Heliane도 예리차를 위해 작곡했다. 코른골트 역시 브르노 출신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예리차의 ‘죽은 도시’공연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달, 예리차는 메트로에서 토스카를 공연했다. 유명한 평론가 리하르트 알드리히는 ‘전율할 정도의 아름다움과 강렬함으로 응축된 공연이었다. 아리아의 소절마다, 연기의 동작마다 다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무한한 본능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예리차는 Vissi d'arte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카르피아의 추악한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며 Vissi d'arte를 불렀다. 이 장면을 푸치니가 직접 보았다. 푸치니는 예리차가 바닥에 쓰러진채 아리아를 부르는 그 모습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다른 소프라노들도 토스카를 공연할 때 바닥에 쓰러져 Vissi d'arte를 부르는 것을 답습하였지만 예리차만큼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해변에 밀려 올라온 고래같이 보였을 뿐이었다. 비엔나에서온 금발의 예리차는 메트로에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최고의 디바로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비엔나로 돌아온 예리차는 1935년까지 슈타츠오퍼에서 활동하다가 전쟁으로 잠시 은둔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난후 예리차는 폭격으로 파괴된 슈타츠오퍼의 재건에 앞장섰다. 비엔나의 시민들은 예리차를 포퍼(Popper) 남작부인이라고 부르며 존경과 사랑을 보냈다. 남작부인(Baroness)이라는 칭호는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요셉 황제가 예리차에게 내려준 칭호였다. 1948년 예리차는 미국 뉴저지의 사업가 어빙 시어리(Irving Seery)와 결혼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예리차는 향년 94세로 1982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날때까지 뉴저지에서 살았다. 마리아 예리차는 오스트리아-체크 공화국-미국의 사랑을 받은 소프라노였다.
타이스
팔리아치의 네다
토스카 보카치오
에바(뉘른베르크의 명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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