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의 나이팅게일 Miliza Korjus (밀리짜 코르유스)
‘베를린의 나이팅게일’이란 애칭으로 불렸던 소프라노 밀리짜 코르유스는 발트해의 에스토니아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정러시아육군의 대령이었다가 나중에는 에스토니아 국방장관의 참모로 활동했다. 원래 그의 선조는 스웨덴에서 왔다. 17세기에 에스토니아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을때 에스토니아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므로 원래 가족 이름도 스웨덴식의 Corjus였으나 나중에 에스토이나식으로 Korjus라고 고쳤다. 밀리짜의 어머니 안나는 에스토니아-폴랜드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밀리짜의 부모는 1차대전 당시 이혼하였다. 밀리짜는 어머니를 따라 동생들과 함께 키에프로 왔다. 말리짜는 키에프음악원에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밀리짜가 아직 10대 소녀일때 키에프의 유명한 둠카(Dumka)합창단원으로 들어가 러시아 순회공연에 참가한 일이 있다. 순회여행중인 1927년 레닌그란드(현 생 페테르부르그)에 들렸을때 밀리짜는 에스토이나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와 합류하여 살기위해 단독으로 국경을 넘었다. 당시 에스토니아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국가였다. 밀리짜는 아버지의 지원과 지도로 발틱 국가들에서 콘서트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트투르 코르유스(Arthur Korjus)는 군인이었지만 바이올린 연주도 아마추어 이상이었고 더구나 오페라에 대하여는 열광적인 팬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음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1남 4년중의 장녀인 밀리짜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자기의 음악생활을 이해하고 후원해 줄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1929년, 밀리짜는 쿠노 휄슈(Kuno Fölsch)라는 물리학자와 결혼하여 독일에 정착하였다. 베를린에서 콘서트 활동을 하기 시작한 밀리짜는 1933년 결국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오페라 출연과 레코딩은 그의 이름을 단번에 널리 알리게 해주었다. 밀리짜는 유럽의 유명 성악가들의 선두에 있게 되었다. 할리우드 MGM의 유명한 제작자 어빙 탈베르크(Irving Thalberg)가 밀리짜의 레코드를 듣고 밀리짜를 만나보지도 않은채 무조건 10년 영화출연 계약을 맺었다. 밀리짜는 1936년 대서양을 건너 헐리우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작자 탈베르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첫 번째 영화 촬영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2년후인 1938년부터 ‘위대한 왈츠’(The Great Waltz)의 촬영에 들어갔다. 이 영화는 공전의 인기를 끌었고 밀리짜는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기까지 했다. 당시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많은 수의 성악가 배우들이 있었지만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은 밀리짜가 유일하였다. 두 번째 영화는 19세기 헝가리의 무법자 ‘산도르 로자’(Sandor Rozsa)에 대한 스토리였다. 헝가리판 로빈 후드였다. 이 영화는 나중에 ‘총과 바이올린’(Guns and Fiddles)라는 타이틀로 바뀌었으며 유명한 오페레타 작곡가인 엠메리히 칼만(Emmerich Kalman)이 리스트의 음악을 발췌하여 영화에 사용하였다. 이 영화에서 밀리짜의 상대역인 산도르 로자는 세기적 미남배우 로버트 테일러였으며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녀배우 헤디 라말(Hedy Lamarr)도 함께 출연하였다.
1940년 5월 28일, 이 영화가 완성되기 2주을 남겨놓고 밀리짜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왼쪽 다리가 심하게 손상을 입어서 의사는 당장이라도 절단수술을 해야한다도 주장하였다. 그러나 몇 달동안의 수차례에 걸친 수술을 거쳐 다행하게도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1941년 여름, 이제 다리의 부상도 거의 완쾌되자 밀리짜는 남미 순회 연주회를 계획하였다. 순회연주는 멕시코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며칠후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밀리짜는 어려서부터 전쟁과 혁명에 휩쓸렸던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멕시코에 눌러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영화에 출연하였다. ‘제국의 기사’(Caballeria del Imperio)였다. 몇 년을 멕시코에서 보낸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카네기 홀에서의 연주회 때문이었다. 1944년 전쟁의 와중에서 열린 밀리짜 코르유스의 카네기 홀 연주회는 대성황이었다. 이에 그는 북미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밀리짜는 1952년 의사인 월터 �터(Walter Shector)와의 결혼과 함께 무대에서 은퇴하고 간간히 음반 취입에만 전념하였다. 첫 남편인 물리학자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 나치를 협조하기 위해 독일에 남았을 공산이 크다. 그는 캘리포니아 사회를 위해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했으며 말년에는 조용히 은거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수많은 후진들이 그를 존경하여 방문하였다. 조안 서더랜드, 비벌리 실스 등이었다. 밀리짜 코르유스는 1980년 파란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The Great Waltz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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