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파란만장의 음악인생 Olive Fremstad (올리브 프렘슈타드)

정준극 2008. 2. 27. 17:02
 

▒ 파란만장의 음악인생 Olive Fremstad (올리브 프렘슈타드)


스웨덴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란 올리브 프렘슈타드는 릴리안 노르디카 등과 함께 20세기의 초반의 ‘오페라 황금시대’를 장식한 위대한 디바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07년 말도 많고 사연도 많은 살로메 미국초연(메트로)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은 것으로 유명하다. 살로메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세례 요한의 목을 안고 키스를 하며 비틀거리는 장면은 당시 청교도 정신이 살아있는 미국 사회에 지나친 충격을 준 것이었다. 때문에 그로부터 메트로는 오페라 살로메의 처절한 장면때문에 공연을 무기한 금지하였다(살로메는 그후 27년이 지난 1934년에 가서야 겨우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프렘슈타드는 놀라운 재능과 뛰어난 미모로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였을뿐만 아니라 무대밖의 생활에 있어서도 수많은 에피소드를 뿌린 것으로 유명하였다. 뉴욕의 평론가 생 존 브레논(St. John Brenon)이 프렘슈타드에 대하여 ‘그는 참으로 위대한 서사시와 같다. 그는 파란만장한 앞날을 예고해 준다. 그는 어떤때는 하늘에 있는것과 같고 어떤 때는 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그는 하늘과 지상을 마음대로 오고 갈수 있는 사람이다. 그만큼 극단적이 면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가 무대에서 아주 평범한 여성으로 등장한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무슨 뜻밖의 일이 터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프렘슈타드를 표현한 적절한 언급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여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올리브 프렘슈타드는 실로 예술에 대한 높은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한편 음악에 있어서도 자기의 메조소프라노 음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바그너의 드라마틱 소프라노 역할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베르디와 푸치니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오페라의 황금시기를 장식한 디바들, 예를 들면 테르니나, 노르디카, 브레마, 바르-밀덴부르크, 릴리 레만등과 함께 길이 기억되는 위대한 예술가였다.


올리브는 스톡홀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내어난 해는 1868년이란 주장도 있고 1871년이란 주장도 있다. 어릴 때 이름은 안나 올리비아 룬드크비스트였다. 어린 올리브는 미국에 사는 스웨덴계 미국이민자 프렘슈타드 부부에게 입양되어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양부모는 올리브가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피아노를 배우게 했고 이어 성악레슨을 받게하였다. 그때부터 성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가진 프렘슈타드는 뉴욕에서 공부를 계속한후 단신 유럽으로 떠났다. 올리브는 1895년 쾰른에서 일 트로바토레의 아주체나를 맡아 첫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프렘슈타드는 오페라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위해 베를린의 유명한 릴리 레만(Lilli Lehmann)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릴리 레만의 남편이 미국에서 온 예쁘고 발랄한 프렘슈타드와 로맨스를 갖게 되자 레만과 프렘슈타드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프렘슈타드는 뛰어난 재능으로 쾰른, 비엔나, 안트워프, 암스텔담, 뮌헨에서 오페라 무대에 진출하였고 이어 바이로이트에서의 링 사리클에소 콘트랄토로서 활동하였다. 프렘슈타드는 이탈리아로 발길을 돌려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소프라노 레퍼토리를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0년 뮌헨궁정오페라에 계약되었을 때는 주로 메조역할을 맡았으며 그중에서 카르멘은 프렘슈타드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32세때에 미국으로 돌아온 프렘슈타드는 메트로의 영접을 받아 당시 ‘오페라 황금시대’의 찬란한 디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메트로 데뷔는 1903년 발퀴레에서 지글린데(Sieglinde)였다. 이 공연에서 브륀힐데는 처음으로 오페라에 데뷔하는 요한나 가드스키(Johanna Gadski)가 맡았었다. 그후 10여 시즌동안 프렘슈타드는 메트로의 핵심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였다. 그의 무대 연기와 성악적 재능은 놀람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전율을 느끼게 해주는 경외스러움과 서사시적 장쾌함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역량은 몇십년 후에 등장한 마리아 칼라스만이 비교될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프렘슈타드는 메트로에서 350여회의 무대 출연을 했다. 대표적인 역할은 탄호이저의 비너스(63회), 파르지팔의 쿤드리(50회), 발퀴레의 지글린데(47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28회), 로엔그린의 엘자(27회) 등이었다. 그러나 그의 레퍼토리는 바그너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 여인’의 셀리카, 클룩의 아르미데,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짜, ‘호프만의 이야기’의 줄리에터, 토스카 등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살로메는 단 1회의 공연만 하였을 뿐이었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너무나 처절한 장면 때문에 관중들의 분노섞인 비난을 받아 계속 공연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중들은 프렘슈타드의 카르멘에 대하여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카루소와 함께 공연한 카르멘은 대호평을 받았다. 이 공연이 있은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에는 대지진과 대화재가 발생한 것은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프렘슈타드의 바그너 레퍼토리중 대표적인 것은 이졸데였다. 뛰어난 해석과 놀라운 연기로 전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1908년 1월 1일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로 공연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역사적인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프렘슈타드는 진정한 프리마 돈나였다. 그는 예술과 함께 살았을 뿐이었다. 무대에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을 우울한 세계에 몰입시켜 지냈으며 일반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이나 동료들과의 어울림도 일체 기피하며 지냈다. 그러나 기자들과는 자주 접촉하였다. 프렘슈타드는 기자들과 만나서   ‘나는 커튼이 올라갈 때 삶의 활기를 찾으며 커튼이 내려질 때 죽음을 느낀다’라고 자주 말하였다. 또 그는 ‘공연을 하지 않을 때의 나의 세계는 마치 외계와 와서 있는 것과 같다. 어두우며 혼돈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세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1913-14년도 시즌이 끝나자 그와 같은 이상한 세계에 더 많이 빠져들어갔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메트로는 그가 한창 정상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재계약을 연기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프렘슈타드는 높은 급여를 요청하였으며 공연을 취소하는 일이 빈번했고 레퍼토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무대에 자주 등장할수 없었으며 행동에 있어서도 전과는 달리 대가의 풍모를 지나치게 내보였다. 그래서 메트로는 보다 재능이 있고 경제적인 신인 멜라니 쿠르트(Melanie Kurt)를 프렘슈타드 대신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프렘슈타드는 한두해 전국 순회의 리사이틀을 가졌고 간혹 시카고, 보스턴, 맨하탄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키로 하자 메트로는 프렘슈타드와의 재계약을 주저하였으며 이를 눈치챈 그는 메트로를 떠났고 미네아폴리스에서의 토스카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무대를 영원히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프렘슈타드는 재기를 꾀하며 ‘운명의 힘’의 레오노라 역할을 열심히 마스터하였다. 하지만 메트로는 레오노라를 젊은 신인 로사 폰셀레(Rosa Ponselle)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서 프렘슈타드는 다시는 대중들 앞에서 다시는 노래부르지 않았다. 프렘슈타드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예술과 결혼했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그는 두 번이나 잠시동안이지만 결혼했었고 로맨스에 휘말려들어간 일도 있지만 종국에는 로맨틱한 일에 얽혀 들어가는데 흥미가 없다고 얘기했다. 일설에는 그가 레스비안이거나 양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왜냐하면 레스비언들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1920년, 49세때에 무대를 은퇴한후 그는 역시 잠시동안이지만 후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무슨 일에나 조금이라도 완벽하지 못하면 참지를 못했다. 어느날 그는 어떤 여학생에게 후두에서의 발성에 대한 것을 가르치면서 먼저 항아리에 담겨있는 절단된 사람의 머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오라고 요구하였다. 그 여학생은 겁에 질려 도망쳤으며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프렘슈타드에게는 이 정도가 별로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살로메 역할을 맡아 출연하기 전에 그는 뉴욕의 무연고자 시체보관소에 들려 자기가 무대에서 쟁반에 담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고 얼마나 비틀거려야 하는지를 무척이나 연구하였다. 그러한 연구 결과 그는 무대에서 여러번 비틀거렸다.


프렘슈타드는 1911-15년 사이에 약 40회의 레코드 취입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음반은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뿐이다. 그는 무언가 남겨 놓는 것을 싫어하였다. 더구나 음반에 대하여 그러했다. 언젠가 그는 ‘나중에 사람들이 나의 음반을 틀고서 야, 이거 그 위대한 올리브 프렘슈타드가 아닌가? 그런데 이게 뭐야! 별거 아니잖아!’라는 소리를 혹시라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레크드를 남기지 않고 싶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아리아는 정말로 섬뜩할 정도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예를 들면 돈 카를로에서 에볼리의 아리아, 미뇽에서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Connais-tu les pays), 그리고 토스카와 탄호이저에서의 아리아이다. 

 

  

 

 살로메                                           이졸데

 

 

 키르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

 

 탄호이저의 비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