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음악을 위한 투혼 Renata Scotto (레나타 스코토)

정준극 2008. 2. 27. 17:08
 

▒ 음악을 위한 투혼 Renata Scotto (레나타 스코토)


저명한 음악 평론가 에탄 모덴(Ethan Mordden)은 ‘스코토만이 헬렌과 아드리아나가 지니고 있는 번뇌의 차이를 구별할수 있으며 레이디 막베스와 노르마가 안고 있는 고통의 차이를 표현할수 있다. 스코토야 말로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중에서 음악을 위해 가장 열심히 투혼(鬪魂)한 소프라노이다. 스코토는 디바 중에서도 데몬토디바(Demontodiva)이다. 스코토가 없는 오페라 공연은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레나타 스코토는 세계 수많은 음악팬들 사이에서 단연 최고의 오페라 디바로 손꼽히고 있다. 스코토는 1950년대 초부터 오페라에 나서기 시작했다. 겨우 20세가 막 지난때부터 무대 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전성기의 스코토는 45편의 서로 다른 오페라에 언제라도 출연할수 있는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한마디로 천부적인 오페라 디바였다. 일반적은 디바들은 통상 5편 정도의 오페라 출연이 보통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열배의 오페라에 아무 때나 출연할수 있다는 것은 초인간적 재능이다.


스코토는 1934년 2월 24일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사보나(Savona)에서 태어났다. 첫 오페라 데뷔는 고향 마을인 사보나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축하 공연때 비올레타를 맡은 것이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서 장미 빛 희망에 부풀어 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인 성탄절에 스코토는 밀라노의 Teatro Nuovo에서 같은 비올레타로 공식 데뷔를 하였고 며칠후에는 사보나에서 처음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출연하였다. 스코토는 나비부인의 출연료로 2만5천 리라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신인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1953년 스코토는 카탈라니의 라 왈리(La Wally)에서 주역인 월터역을 맡기 위한 오디션에 참가했다. 이 오디션에는 스코토보다 10년이나 훨씬 위인 레나타 테발디와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도 참가했다. 스코토가 오디션에서 아리아를 부르고 나오자 심사위원장인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ga)는 ‘다른 사람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해 12월 7일 공연된 라 왈리에서 스코토는 15번이나 커튼콜에 불려 나가야 했다. 라 왈리에서 다른 역으로 출연했던 테발디와 마리오 델 모나코는 미안하지만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스코토는 이탈리아 전국에 알려진 디바가 되어 어디를 가든지 팬들에 휩싸이게 되었다.


1957년 말, 라 스칼라 오페라단은 영국 에든버러에서 벨리니의 몽유병자를 공연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주인공인 아미나역을 맡았다. 공연은 대단한 성공이어서 칼라스는 이틀후 앙코르 공연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바로 그날 어떤 저명인사가 자기를 위해 베푸는 파티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아미나를 다시 부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앙코르 공연에 출연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연 이틀을 남겨놓고 칼라스 대신 스코토가 아미나 역을 맡게 되었다. 스코토 출연의 몽유병자는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대성공을 기록하였다. 23세의 레나타 스코토는 일약 세계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어쩐 일인지 그때부터 칼라스와 스코토는 서먹한 관계가 되었으며 이 관계는 칼라스와 테발디의 관계나 마찬가지로 극성팬들 때문에 이상하게 악화되었다.


1960년 6월, 스코토는 로렌조 안셀미(Lorenzo Anselmi)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딸 로라와 아들 필리포를 두었다. 결혼한 해의 10월쯤, 스코토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미미를 맡아 출연하고 있었다. 하루는 다른 사람이 출연하는 날이었기에 집에서 쉬고 있다가 남편과 함께 오페라를 구경가기로 결정하여 코벤트 가든에 전화를 걸었다. ‘금야(今夜)의 공연 타이틀은 무엇이나이까?’라고 묻자 극장측은 ‘오늘밤에는 라 보엠이올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스코토는 ‘아니, 라보엠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벤트 가든에서는 무얼 공연하는지 알고 싶나이다’라고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는 로얄 오페라 하우스올시다. 그리고 코벤트 가든에서는 오늘 아무런 공연도 없어요. 오늘밤에도 레나타 스코토가 미미역을 맡아 나오기 때문이지요. 아주머니! 구경오시려면 빨리 서둘러야 할겁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날밤 스코토는 가까스로 막이 오르기 직전 분장실에 도착할수 있었다.


1965년 10월, 스코토는 마침내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나비부인의 초초상이었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은 스코토의 나비부인 공연에 대하여 ‘기쁨이 넘치는 잊을수 없는 공연이었다. 새로운 젊은 디바에 대한 평가는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만 보아도 알수있었다’라고 보도했다. 1970년 스코토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적대적인 관중들 앞에서 공연한 일이 있었다. 베르디의 ‘시실리의 만종’에서 엘레나 역할을 맡아 노래하는 중, 객석 한구석에서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소란하게 ‘브라바, 칼라스!’라고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들 마리아 칼라스 극성팬들은 ‘마리아, 마리아’를 소리치면서 공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바로 2층의 박스 좌석에서 이 공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스코토가 Un bel di vedrimo를 끝내자 칼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칼라스’를 외쳐 대던 소리는 어느덧 사라졌다.


40년 이상이나 스코토는 벨리니로부터 볼프-페라리에 이르기까지 18명 작곡가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공연한 라 조콘다는 에미(Emmy)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 공연은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날 공연은 유명 영제작사의 다큐멘타리 팀이 공연실황을 촬영하고 있었다. 스코토는 3막에서 갑자기 다큐멘타리 촬영팀을 향하여 ‘Siete gente di merda!'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똥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해석할수 있고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번역할수도 있다. 그날 1막이 끝나고 연출감독이 커튼콜 시간에 스코토를 제쳐놓고 상대역인 무명의 테너만을 다시 한번 커튼콜에 내보냈었다. 관중들은 스코토의 이름만을 열광적으로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타리 팀의 요청대로 테너만을 내보냈던 것이다. 스코토는 상당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2막에서 그런 연출을 하였던 것이다.


스코토의 최적 배역은 비올레타, 미미, 초초상, 루치아, 막베스의 레이디 막베스, 그리고 리카르도 찬도나이의 ‘리미니의 프란체스카’(Francesca da Rimini)에서의 프란체스카이다. 최근 스코토는 오페라 감독으로서도 훌륭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는 한편 자기의 레퍼토리에 새로운 역할을 추가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메노티의 메디움, 풀랑크의 ‘인간의 음성’(La Voix Humaine)등이다. 1992년에는 ‘장미의 기사’에서 마샬린을 훌륭히 소화하였고 1995년에는 파르지팔의 쿤드리(Kundry)를 맡아 갈채를 받았다. 스코토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큰 저택에서 살고 있으며 뉴욕에는 메트로 바로 뒤편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

 

 

 아드리아나 르크부로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나비부인

 돈 카를로의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