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라스의 라이발? Renata Tebaldi (레나타 테발디)
레나타 테발디(원래 이름은 Renata Ersilia Clotilde Tebaldi)는 1922년 2월 1일 이탈리아의 페사로(Pesaro)에서 태어났다.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1년 위였다. 테발디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 살때에 소아마비에 걸려 밖에서 뛰어 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행동이 불편했던 테발디는 대신 음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음악적 소질을 발견한 그의 부모는 10대의 테발디를 파르마 콘서바토리에 입학시켰다. 테발디는 이곳에서 전설적인 에토레 캄포갈리아니(Ettore Capmpogagliani)로부터 3년 동안 성악 수업을 받았고 다시 3년동안 소프라노 카르멘 멜리스(Carmen Melis)에게서 본격 성악 공부를 했다. 테발디는 22세 때에 보이토의 메피스토렐레(Mefistofele)에서 주역인 엘레나(트로이의 헬렌)역을 맡음으로서 오페라에 첫 데뷔하였다.
1946년, 테발디는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서 오디션을 받기위해 밀라노로 갔다. 테발디의 노래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무척 감명을 받았다. 테발디는 그해에 라 스칼라의 시즌 오픈 연주회에서 로시니의 종교 오페라 ‘모세’의 기도송과 베르디의 테 데움(Te Deum)에서 소프라노 파트를 불렀다. 관중들은 경이적인 시선으로 테발디에게 박수를 보냈다. 테발디는 그로부터 5년 동안 라 스칼라 전속으로 활동했다. 1951년, 라 스칼라에서의 테발디의 위상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외국인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의 등장이었다. 어느때 테발디가 아이다를 맡기로 한 공연이 있었다. 그러나 테발디는 어쩔수 없는 사정 때문에 출연하기 어렵게 되었다. 극장측은 아이다를 대신 맡아할 사람을 급히 찾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칼라스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로부터 음악사상 유명한 칼라스와 테발디의 라이벌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실상 두 사람은 아무런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고 하는데 다만 칼라스를 추종하는 세력(이들을 팬이라고 부름)과 테발디를 추종하는 세력사이에 서로 자기의 디바가 최고라는 자화자찬과 함께 상대방을 은근히 비난하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칼라스의 라이발로는 레나타 스코토와 레나타 테발디가 있었던 셈이었다.
테발디의 미국 오페라무대 상륙은 1954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아이다 공연이었다. 몇 달후인 1955년 1월 31일, 테발디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맡아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오텔로에서의 상대역은 마리오 델 모나코였다. 그로부터 테발디는 메트로의 단골 주역으로서 라 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토스카, 데스데모나, 마농을 맡아 1950년대 미국 오페라계의 새로운 스타로 등장하였다. 테발디는 메트로를 두 어깨에 떠멘 간판스타가 되었다. 메트로는 보석과 같은 테발디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예를 들면 비올레타를 맡았을 때에 그를 위해 별도의 무대 장치를 새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당시 마리아 칼라스도 메트로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노르마와 루치아의 역할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라 스칼라에서 비롯된 라이벌 캠페인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모두 메트로에 있음으로해서 본격화 되어 상대방의 공연시 팬들이 고함을 지르고 야유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1960년 3월 4일은 테발디로서 잊지 못할 날이었다. 메트로에서 ‘운명의 힘’을 공연하고 있었다. 사건은 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2막의 중간쯤해서 바리톤인 레오나르드 워렌(Leonard Warren)이 돈 카를로의 카발레타를 마치려는 순간, 뜻밖에도 무대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마침 테발디는 그 순간에 무대에 없었지만 관중들은 워렌의 뜻하지 아니한 죽음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직접 지켜보아야 했다. 조금전까지도 함께 노래를 불렀던 바리톤의 죽음은 테발디에게 큰 충격이었다. 테발디는 메트로를 이끄는 대스타였다. 1962/63년 시즌에 테발디는 음악총감독인 루돌프 빙을 설득하여 평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로를 무대에 올려 돌라고 간청했다. 테발디는 주인공의 역할과 노래가 자기의 목소리에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역은 프랑코 코렐리로 정해졌다. 실상 메트로는 오래전부터 아드리아나 르쿠브로를 공연코자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음악총감독 루돌프 빙은 테발디가 이 오페라의 타이틀 롤로서 가장 합당함으로 대성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아리아드네 르쿠브로가 무대에 올려졌을 때 테발디의 목소리는 위기 그 자체였다. 피곤한 소리였고 활기가 없었으며 쇠한 소리였다. 객석에 있던 테발디 팬들은 놀란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테발디는 중도 하차하였고 그로부터 1년이 넘게 메트로를 떠나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13개월후 테발디는 미미로서 메트로에 다시 돌아왔다. 미미는 대성공이었다.
1968년 9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테발디와 칼라스의 라이벌은 두 사람의 우정 어린 포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칼라스가 아리아드네 루크브르의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왔을 때 테발디가 치하의 말을 하기 위해 칼라스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앞에서 포옹하였다. 칼라스의 그 큰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칼라스는 1977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숙적과 같은 라이벌이었던 테발디에 대하여 찬사와 존경의 말만 했다. 테발디의 역할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황금서부의 아가씨’ 중 미니(Minnie)의 역이었다. 테발디가 메트로에서 이 오페라를 처음 공연할 때 연출자는 테발디에게 제3막에서 미니는 말을 타고 등장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평생동안 말에 대하여 공포감을 가지고 있던 테발디는 당황하고 난감한 입장이었다. 이윽고 막이 오를 순간에 테발디는 말에게 다가서서 ‘자. 미스터 말님, 내가 누군가요? 난 테발디랍니다! 우리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그렇지?’라고 속삭였다. 과연 제3막에서 테발디는 생전 처음으로 말을 타고 무대에 등장하여 팬들을 놀라게 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레나타 테발디는 의심할 여지없이 금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중의 하나이다. 비록 마리아 칼라스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모으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음악이었다. 테발디는 미미로서, 비올레타와 토스카로서, 그리고 미니(황금서부의 아가씨)와 맛달레나(안드레아 슈니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테발디는 현재 밀라노에서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다. 테발디가 마지막으로 오페라에 출연한 것은 1973년이었으니 30년이 넘게 무대를 떠나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취입한 음반은 세계 어디에서나 아직도 팬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토스카
로엔그린의 엘자
아이다(암네리스의 리타 고르와 함께)
미미(로돌포의 유씨 비욜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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