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비엔나의 나이팅게일 Rita Streich (리타 슈트라이히)

정준극 2008. 2. 27. 17:11
 

▒ 비엔나의 나이팅게일 Rita Streich (리타 슈트라이히)


‘비엔나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리타 슈트라이히는 20세기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활동했으나 정작 애착을 가지고 세상 떠날 때 까지 산곳은 비엔나였다. 1920년 시베리아의 바르나울(Barnaul)이란 곳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타는 어릴때 아버지의 고국인 독일로 돌아와 평소의 소원인 성악공부를 위해 아우그스부르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리타의 첫 오페라 출연은 1943년 아우씨히(Asussig)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였다. 당시는 히틀러에 의한 전쟁이 한창이었다. 모두들 베를린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았지만 리타는 베를린으로 올라가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인 에르나 버거(Erna Berger)의 문하생이 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때에 베를린에서의 음악활동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한 때에 리타는 에르나 버거의 유일한 제자였다. 전쟁이 끝난후 리타는 드디어 베를린 오페라와 전속계약을 맺을수 있었다. 에르나 버거는 포탄이 떨어지는 중에서도 자기를 극진히 선생으로 섬긴 리타를 훌륭하게 인정하여 베를린오페라에 적극 추천하였던 것이다. 천성이 명랑하며 외모 또한 깔끔하게 매력적인 리타는 타고난 아름다운 음성으로 순식간에 베를린오페라의 히로인이 되었다. 1945년 9월 20일, 리타의 베를린오페라 첫 데뷔는 리골레토에서 단역을 맡은것이었다. 에르나 버거가 질다를 맡은 이 공연에서 리타는 만투아공작 저택의 사환을 맡았을 뿐이었다. 이듬해에 리타는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오펠리아를 맡아 처음으로 주역급으로 등장할수 있었다. 그후 1950년까지 리타는 베를린 슈타츠오퍼 (나중에는 도이치오퍼)에서 콘스탄체(후궁에서의 도피), 밤의 여왕(마적), 그레텔(헨젤과 그레텔), 돈나 안나(돈 조반니), 조피(장미의 기사), 나비부인 등을 맡아 사랑을 받았다.


1953년 리타는 비엔나 슈타츠오퍼로 주소지를 옮겼다. 비엔나는 리타의 모든 것에 알맞은 곳이었다. 그후 1974년까지 무려 20여년을 비엔나에 거점을 두고 유럽 각지와 미국, 캐나다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여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을 받았다. 비엔나 사람들은 기질(Wienerblut)에 흠뻑 젖어 있는 리타를 보고 ‘비엔나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렀다. 그의 명랑한 성격은 오페라 공연에서도 필요할 때마다 살짝 유머스러운 터치를 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운 미소를 띠게 해주었다. 리타의 대표적인 역할은 ‘밤의 여왕’과 체르비네타(낙소스의 아리아드네)였다. 카라얀은 ‘리타는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성격도 아름답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두가지를 합한 그의 노래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의 음성은 아름다우며 복잡하지 않고 깨끗하다는 평을 받았다. 슈베르트의 가곡 ‘바위 위의 목동’은 리타를 따라 갈 사람이 없다. 음반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박쥐’였다.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가 로잘린데를, 니콜라이 겟다가 가브리엘 폰 아이젠슈타인을, 그리고 리타 슈트라이히가 아델레를 맡은 것이었다. 리타는 비엔나의 영원한 아델레였다. 리타가 주로 출연했던 오페라는 ‘후궁에서의 도피’, ‘헨젤과 그레텔’, 마적, 파르지팔, 돈 조반니,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아랫마을’, ‘나비부인’, ‘장미의 기사’등이었지만 비엔나 생활에서는 비엔나 오페레타에서도 타고난 미모와 함께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리타는 1987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에 능하였다.

 

 

 

 

 

 

 

 미뇽                                                          아리아드네

 

 조피(장미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