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선으로 자기 완성 Reri Grist (레리 그라이스트)
미국의 블랙 소프라노 레리 그라이스트(또는 그리스트)는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잘츠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무대를 압도하였던 빛나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된 훈련을 통하여 자기를 완성한 몇 안되는 아티스트이다. 어릴때에 댄스를 배운 것과 그후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과 연극에 출연했던 경험은 그를 전천후의 노래하는 배우로 가다듬어 주었다. 그 결과 그는 놀라운 재능과 해석으로 어느 역할에서나 격찬을 받았다. 조피(장미의 기사), 체르비네타(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수잔나(피가로의 결혼), 블론드헨(후궁에서의 도피), 로지나(세빌리아의 이발사), 오스카(가면무도회) 등이었다.
그의 생활은 훗날 자기 자신의 무대가 되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라이스트는 1932년 2월 29일 오늘날 스패니쉬 할렘이라고 부르는 뉴욕의 이스트 리버 드라이브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1792년 로시니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웃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서 평화롭고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푸에르토리코, 폴란드, 아프리카-아메리카 사람들이 혼합하여 살고 있는 동네였다. 그라이스트의 부모는 서인도제도에서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무척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어린 딸에게 ‘최선보다 더 좋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예술가로 키우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모두 유명한 영화배우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라이스트의 이름인 레리(Reri)는 ‘타부’(Tabu)라는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자기의 딸이 부끄러움이 많지만 예쁘고 발랄한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라이스트는 타부라는 영화를 본 일이 없다. 다만, 남편이 몇 년전 베를린에서 TV에서 그 영화를 상영해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런 영화가 진짜 있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라이스트에게 처음 제안된 역할은 파미나였다. 그라이스트의 리릭 소프라노 음색을 높이 평가한 어떤 사람이 그렇게 추천을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좌우명 때문에 그 역할을 사양하였다. 당시 그는 결혼하여 애기가 있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오페라 출연자로서 한꺼번에 모든 일을 성실하게 집중하여서 감당할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몇 년후 그는 마스네의 마농을 맡았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자기의 성악적 영역을 리릭으로 치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라이스트의 생애에 깊은 감동을 준 사람은 헬렌 헤이스(Helen Hayes)와 폴 로우브슨(Paul Robeson)이었다. 방학기간중에 그는 브로드웨이 연극에 출연한 일이 있다. 체호프의 ‘체리 오챠드’(The Cherry Orchard)에서 흑인 하녀 역이었다. 연극의 무대가 남부이기 때문에 하인들은 모두 흑인이었다. 그라이스트의 역할은 하녀로서 무대 한 구석에 서서 한 두마디 대사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공연에서 그라이스트는 헬렌 헤이스에게 완전히 압도당하였다. 헬렌 헤이스는 자그마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음성은 극장안을 충만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라이스트는 어떻게 소리를 내야 저렇게 되는지 궁금하였고 그런 음성을 내는 헬렌 헤이스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다음으로는 폴 로우브슨이었다. 어릴때 그라이스트는 어머니와 함께 폴 로우브슨의 공연에 데려갔다. 극장안의 자리는 꼭대기 발코니였다. 그런 구석인데도 로우브슨의 음성은 마루를 흔들었다. 마루바닥이 흔들리는 바람에 어린 그라이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내려앉고 말았다. 이 때의 일을 잊지 못하는 그라이스트는 성악가라면 저만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 한사람의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 레오나드 번슈타인이었다. 번슈타인은 흑인 성악가들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으며 이들의 연주회를 자주 주선하였다. 예를 들면 베티 알렌(Betty Allen), 아델레 애디슨(Adele Addison)등은 번슈타인의 배려로 연주회에 출연하고 계속 발전할수 있었다. 어느때 번슈타인은 그라이스트에게 말러의 교향곡 제4번의 연주를 맡도록 주선하였다. 그라이스트는 자기가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음성이 번슈타인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라이스트는 만일 번슈타인이 ‘당신은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배려한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번슈타인은 정말로 순수하게 음악만을 생각하며 리허설을 하고 연주회를 마치게 해주었다. 번슈타인은 그라이스트를 다른 성악가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하였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라이스트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번슈타인의 지휘로 3개 시즌동안 ‘장미의 기사’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라이스트로서는 매우 걱정이 되기도 하고 흥분된 기회였다. 우선 ‘장미의 기사’에 처음으로 출연하며 조피를 처음 맡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 비엔나의 일각에서는 ‘흑인이 어떻게 조피를 맡는단 말인가?’라면서 상당히 문제를 일으켰다. 비엔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조피는 ‘자기들의 조피’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얘기들은 당시 임신 7개월의 힘든 상태였던 그라이스트에게 상당한 마음 걱정을 던져준 것이었다. 그러나 번슈타인은 ‘그 여자가 노래합니다’라고 한마디로 비엔나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종식시켰다. 그라이스트는 어느 누구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굳건히 내세우는 번슈타인에 대하여 더 한층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 기간중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그라이스트는 슬픔에 잠겨 분장실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번슈타인이 들어와 눈물을 흘리며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그라이스트의 첫 오페라 데뷔는 뉴멕시코의 산타페에서 블랑계 테봄 상을 받아 출연하게 된 것이었다. 무대감독인 허버트 블리스(Herbert Bliss)의 자상한 도움이 컸다. 블리스는 젊은 사람들과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뉴욕의 스패니쉬 할렘에서 자라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겨우 학교를 마칠수 있었던 그라이스트에게 있어서 산타페는 즐거움이었다. 유럽 데뷔는 독일 쾰른에서의 ‘밤의 여왕’(마적)이었다. 그는 한번도 리허설을 하지 못한채 극장에 도착하였다. 그는 무대가 어떤 규모인지, 상대역은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른채 공연에 임해야 했다. 그저 무대감독으로부터 여기서 저기로 옮기고, 여기 서있고 등등의 기본적인 얘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라이스트는 ‘마적’에 출연한 첫 흑인 여성 성악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라이스트의 마지막 오페라 공연은 1991년 암스테르담에서 노튼 펠트만(Norton Feldman)의 작품인 ‘Neither'라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상당한 도전이 필요한 역할이었다. 여인 1인이 나오는 오페라였다. 그는 온 힘과 열정을 다하여 공연하였다. 공연전의 리허설 기간동안에는 악보를 수도 없이 고쳐가며 연습에 힘을 쏟았다. 공연이 끝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그라이스트는 주인공의 정신병적 연기를 온 힘을 쏟으며 그야말로 실감있게 하였다.
마적의 파미나 호프만의 이야기의 올림피아
셰마크(Shemakh) 여왕
'디바·디보의 세계 > 세계의 소프라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엔나의 나이팅게일 Rita Streich (리타 슈트라이히) (0) | 2008.02.27 |
---|---|
놀라운 음역의 Rita Fornia (리타 포르니아) (0) | 2008.02.27 |
만인의 연인 Renée Fleming (르네 플레밍) (0) | 2008.02.27 |
그라츠의 수퍼스타 Renate Behle (레나테 벨레) (0) | 2008.02.27 |
칼라스의 라이발? Renata Tebaldi (레나타 테발디) (0) | 2008.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