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파리의 독일인 Ute Lemper (우테 렘퍼)

정준극 2008. 2. 27. 17:32
 

▒ 파리의 독일인 Ute Lemper (우테 렘퍼)


파리의 독일인’(A German in Paris)으로 더 잘 알려진 여배우 우테 렘퍼는 오페라보다는 캬바레 스타일의 뮤지컬 아티스트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파리의 독일인’이란 표현은 독일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외국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리아 칼라스,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와 같은 디바의 반열에 포함하기는 어렵지만 오페라와 뮤지컬에 대한 차별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요즘의 현실에서 우테 렘퍼를 소개함은 고전적인 오페라 성악을 공부했어도 뮤지컬 스타로서 활동할수 있다는 성공사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라 트라비아타’ 또는 ‘라 보엠’만이 오페라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현대 작곡가에 의한 오페라도 엄연히 베르디, 푸치니와 같은 항렬에 있는 것이다. 우테 렘퍼가 쿠르트 봐일(Kurt Weil)의 오페라 ‘일곱가지 큰 죄악’(The Seven Deadly Sins)에 출연한 것은 똑같은 오페라 디바로서 찬사를 받아야 하는 일이다.


우테 렘퍼는 1963년 독일의 뮌스터(Münster)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가였으며 어머니는 오페라 성악가였다. 렘퍼는 아홉 살때부터 피아노와 댄스 레슨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어머니는 오페라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미국 재즈와 팝 뮤직을 좋아했기 때문에 어린 렘퍼도 재즈와 팝을 들으며 자라났다. 잘츠부르크, 쾰른, 베를린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그는 20세도 되기전에 비엔나의 막스 라인하르트 고전연극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렘퍼의 무대 경력은 15세 때부터 시작하였다. 재즈와 피아노 바에서 일 했던 것이 스테이지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때 펑크 그룹인 The Panama Drive Band의 일원으로 활동한 일도 있다. 렘퍼는 오페라보다 연극으로 전문 경력을 시작하였다.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에서 화쓰빈더(Fassbinder)와 체호프(Chekhov)의 연극에 출연하여 연극배우로서의 경력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83년, 20세밖에 되지 않은 때에 세계적 뮤지컬 제작자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초청을 받아 비엔나에서의 캣츠(Cats)공연에 출연한 것은 뮤지컬의 길을 확실하게 걷게 된 발판이었다. 처음에는 단역이었으나 1년후에는 주역을 맡게 되었다. 2년후, 그는 베를린에서 뮤지컬 피터 팬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모두들 렘퍼의 세련된 댄스 실력과 노래에 찬사를 보냈다. 같은 해에 렘퍼는 쿠르트 봐일(1900-1950)을 발견하였다. 그로부터 렘퍼는 봐일의 작품 인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무대 생활을 했다. 1987년, 렘퍼는 뉴욕에서 쿠르트 봐일의 생애와 작품 생활을 기본으로 한 쇼에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렘퍼는 이 작품으로 최초의 세계 순회공연에 참여할수 있어다. ‘쿠르트 봐일 쇼’는 밀라노, 베를린, 토쿄, 홍콩, 뉴욕, 파리, 예루살렘, 런던, 바르셀로나에서 공연되었다.  렘퍼는 여러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피에르 그라니에-드프레(Pierre Granier-Deferre)의 ‘오스트리아 여인’ L'Autrichienne에서 마리-앙투아네트 왕비, 피터 그린어웨이(Peter Greenaway)의 Prospero's Books에서 세레스(Ceres),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의 Prêt á Porter에서 알베르타를 맡았다. 특히 알베르타 역할 때에는 당시 임신중이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 누드로 등장하여 주목을 받았다.


누구든지 그렇지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서 외국에서 화려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고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무언가 헛 성공한 느낌을 갖게 된다. 독일에서 렘퍼의 인기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1992년 블루 에인젤(Blue Angel)에서 롤라(Lola)를 맡은 것으로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독일에서 렘퍼는 싸구려 나이트클럽 출연자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다. 마음속 깊이 상처를 입은 그는 자기를 알아주는 파리, 런던,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인 데이빗 타바츠키(David Tabatsky)를 만나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막스와 딸 스텔라를 두었다. 알베르타에서 누드로 공연할 때에는 아들 막스를 임신중이었다. 렘퍼는 진정한 아티스트이다. 영광과 갈채의 면류관에 연연하지 않는 아티스트이다. 그는 언제나 어떠한 변화든지 마음을 열고 받아 들였다. 쿠르트 봐일에 전념했던 그는 캬바레(Cabaret)와 시카고(Chicago)가 등장하자 이들 새로운 뮤지컬에서 요부의 역할을 맡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렘퍼는 시카고에서의 연기로 뮤지컬 최우수 여배우에게 주는 ‘로렌스 올리비에상’을 받았다.


우테 렘퍼의 진면목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쿠르트 봐일의 ‘일곱가지 큰 죄악’을 공연하여 들어내 보였다. 켄트 나가노(Kent Nagano)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의 연주였다. 그의 연기력, 댄스 솜씨, 노래는 과연 무대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렘퍼의 춤 솜씨는 모리스 베자르(Maurice Béjart)의 발레 곡인 La Mort Subite에서 놀라운 현대 발레 재능을 보여준 것이었다. 렘퍼는 뛰어난 화가이기도 하다. 1993년 그는 파리와 함부르크에서 유화개인전을 가져 찬사를 받았다. 그는 논설가이기도 하다. 리베라숑(Libération), 디 벨트(Die Welt), 가디안(The Guradian)지에 여러번이나 논설을 기고하였다. 그는 집필가였다. 그의 첫 저서인 ‘무검열’(Unzensiert)는 1995년 출판되었다. 그는 1991년에 ‘마음속의 범죄’(Crimes of the Heart)라는 타이틀의 음반을 내어 화제를 모았으며 최근 두 번째 음반인 ‘단죄의 키스’(Punishing Kiss)를 내놓아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