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하늘의 선물 Giulietta Simionato (줄리에타 시미오나토)

정준극 2008. 2. 28. 11:44
하늘의 선물 Giulietta Simionato (줄리에타 시미오나토)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성악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의 메조소프라노 줄리에타 시미오나토의 말이다. 시미오나토는 메조이면서 소프라노 역할을 자청하여 했다. 그는 다른 메조소프라노들이 부러워할 만큼 고음을 낼수 있었다. 시미오나토는 그것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청해서 드라마틱 소프라노 역을 맡고자 했다. 그러나 성악 선생은 시미오나토에게 공연히 소프라노 파트를 맡지 않도록 경고를 주었다. 성악 선생은 ‘너의 소리는 전형적인 메조이다. 성악의 파트를 결정하는 것은 음역이 아니라 음색이다’라고 충고해 주었다. 시미오나토는 자기가 활콘(Falcon)이라고 생각했다. (☺ Falcon은 송골매라는 뜻이지만 성악에서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중간 음역을 말한다. 송골매처럼 하늘 높이 치솟을수도 있고 먹이를 향해 땅바닥으로 쏜살같이 내려올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시미오나토는 1962년 라 스칼라에서의 우고노티에서 발렌티나역을 맡아 Falcom과 같은 뛰어난 재능을 보여 무대를 압도했다. 그러면서도 시미오나토의 음성은 부드럽게 무르익은 것이었다. 시미오나토는 당대의 메조소프라노인 시냐(Cigna)가 파고드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낸 것과는 달리 무르익은 음성을 들려주었다. 시미오나토는 하늘이 내려준 소프라노 겸 메조소프라노였다.

 


줄리에타 시미오나토는 1910년 이탈리아의 사르디나아 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성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시미오나토는 23세 때에 르네상스의 본고장 플로렌스에서 열렸던 성악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3년후 시미오나토는 라 스칼라와 계약을 맺는다. 다만 콤프리마리아(Comprimario)였다. (☻ Comprimario는 일반적으로 조연급 출연자를 말하지만 대개의 경우 주연급 출연자가 사정상 출연치 못할 경우 대역으로 나가기 위해 스탠드바이 하는 사람을 말한다. 분장까지 하고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 일도 없으면 분장을 짓고 옷 갈아입고 집에 가는 경우도 많다.) 시미오나토는 이때의 어려움을 디바가 되고 나서도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시미오나토의 진가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11년 후였다. 마쓰네의 마농이었다. 사람들은 시미오나토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왔다. 그러나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새로운 스타 시미오나토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자리를 뜰줄 몰랐다. 시미오나토의 출현은 마치 하늘이 묵시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로 시미오나토는 세계를 주름잡는 메조소프라노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런던, 파리, 베를린, 뮌헨, 비엔나, 브뤼셀, 뉴욕, 시카고,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 데 쟈네이로에서 오페라에 출연했으며 홀란드 페스티벌, 베로나 페스티벌, 글린드본 페스티벌, 에딘버라 페스티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등 세계 유명 음악 페스티벌을 휩쓴다. 음반 취입은 비밀결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라 체네렌톨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알제리의 이탈리아인, 일 트로바토레, 라 화보리타, 리골레토, 라 죠콘다, 우고노티, 노르마, 안나 볼레나, 메데아 등이다. 어찌된 일인지 푸치니는 상대하지 않았다. 아마 푸치니의 오페라에는 메조의 역할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인것 같다.

 

산뚜자


시미오나토의 개인 생활, 특히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고 분방한 것이었다. 시미오나토는 라 스칼라에서 콤프리마리오(조역만을 맡도록 연습된 성악가)로 있을 때 오케스트라의 어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와 결혼하였다. 몇 년후 시미오나토는 라 스칼라에 전속되어 있는 베이스-바리톤 마리오 페트리와 그렇고 그런 사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수근 거리며 쉬쉬할 정도였다. 나중에 시미오나토는 남편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정말 아니올시다!’였기 때문에 그와 이혼하기 위해 일부러 마리오 페트리와 썸싱이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실제로 시미오나토는 어떤 유명한 의사와 오래동안 애정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미오나토에 의하면 그 의사의 부인은 ‘자포자기의 미치광이 같았으며 가끔은 정신 이상자 같았다’고 한다. 그 의사는 차마 부인에게 이혼하자고 말을 못하고 지내던중 부인의 증상이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하였다. 시미오나토가 불과 32세 때였다. 결혼한 다음해에 시미오나토는 오페라 무대를 떠나겠다고 발표한다. 만일 시미오나토가 그 의사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 세계의 오페라 무대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시미오나토는 음악보다 가정을 택하였다. 10여년후 의사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시미오나토는 옛날부터 친구였던 어떤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하여 살았으나 그도 1996년 세상을 떠나 혼자 살고 있다가 2010년 5월에 향년 99세로 세상을 떠났다.

 

에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