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하는 화란여인 Nan Merriman (난 메리만)
1920년 피츠버그에서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태어난 미모의 메조소프라노 난 메리만(실명은 캐서린-앤)은 알렉시아 바씨안(Alexia Bassian)과 로테 레만(Lotte Lehmann)에게서 공부했다. 메리만의 무대 출연은 1940년, 그가 20세때부터 시작되었다. 로렌스 올리비에(Lawrence Olivier)와 비비안 리(Vivien Leigh)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할때 막이 바뀌는 중간 시간에 무대에 나와 팔레스트리나, 또는 헨리 퍼셀의 노래를 불렀다. 몇 년후 메리만은 NBC방송이 주관한 성악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토스카니니는 메리만의 노래를 듣고 즉각 유망주라고 판단하여 레코딩 계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메리만은 1944년 토스카니니 지휘의 오르페오(오르페오), 활슈타프(미쓰 페이지), 리골레토(맛달레나), 오텔로(에밀리아) 레코딩에 참여하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메리만은 뜻한바 있어서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로부터 메리만의 활동은 유럽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1950년대에 액-생-프로방스, 피콜라 스칼라, 글린드본에서 도라벨라(여자는 다 그래)로 찬사를 받았다. 그중에서 특기한 만한 공연은 1953년 에든버러에서 공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레이크의 인생 역정’, 1958년 다르고미츠스키 ‘석상 손님’(The Stone Guest)의 영국초연에서 터키 바바(Baba the Turk)와 로라(Laura)를 맡은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같은 역할로 비엔나, 밀라노, 파리 등지의 무대를 장식했다. 그의 음성은 메조로서 가볍고 경쾌한 편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메리만의 음성을 콜로라투라 메조소프라노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음성은 메트로와 같은 대형 무대에서 기회가 별로 없다. 메리만은 메트로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자그마한 무대에서는 대인기였다. 그는 특히 화란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오페라뿐만 아니라 콘서트와 리사이틀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메리만은 결혼하고나서 1965년 4월 완전히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남편은 훌륭한 오라토리오 테너였다. 그의 재능은 비교적 늦게 발견되어 성악공부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였다. 그는 명문 마스트리히트(Maastricht)대학을 나왔다. 그는 1960년대 초반에 상처를 하였다. 자녀가 열명이나 있었다. 메리만은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였으며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10명의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자기의 경력을 포기하였다. 1965년이었다. 불행하게도 남편은 결혼한 다음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만은 화란에 영주키로 결심하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데에만 온 정성을 다하였다.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여 각자 자기의 인생을 개척하게 되자 메리만은 1973년 로스앤젤레스로 왔고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자는 다 그래'에서 도라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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