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콘트랄토

전설을 창조 Ernestine Schumann-Heink (에르네스티네 슈만-하인크)

정준극 2008. 2. 28. 13:27
 

▒ 전설을 창조 Ernestine Schumann-Heink (에르네스티네 슈만-하인크)

 

 


에르네스티네 슈만-하인크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였다. 그러나 그는 소프라노보다는 콘트랄토로 더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베르디와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무대에 서기가 어려워졌어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전설적인 소프라노였다. 1861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라하 인근 리벤(Lieben)에서 에르네스티네 뢰슬러(Ernestine Rössl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무슨 일에나 도전적이고 고집이 셌다. 그의 부드러운 자질과 예술에 대한 감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에르네스티네에게 노래부르는 법을 가르쳤다. 14세때 그는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았다. 일 트로바토레였다. 레오노라는 그에게 오페라 아티스트로의 꿈을 키워준 주인공이었다. 오페라에 데뷔한 이후 최고의 레오노라로서 찬사를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882년 21세때에 그는 에른스트 하인크와 결혼했다. 1887년부터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한 그는 베를린, 런던,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무대에 섰다. 미국의 유명한 바그너 소프라노인 릴리안 노르디카(Lillian Nordica)가 에르네스티네를 깊이 주목하였다. 릴리안은 에르네스티네에게 뉴욕의 상류사회에 소개하였고 돌봐주었다.

 

 에르다

 

1893년 에르네스티네는 하인크와 이혼하고 배우이며 함부르크 탈리아 극장 감독인 파울 슈만(Paul Schumann)과 결혼하였다. 그로부터 기자들은 에르네스티네를 마담 슈만-하인크라고 불렀다. 남편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에게 노래하기 전에 가사를 전달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노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노래 소절을 구분하는 법, 발음, 가사에 대한 이해는 모두 남편 슈만으로부터 배운것이었다. 슈만은 1904년 에르네스티네가 43세 때 세상을 떠났다. 1898년부터 1903년, 즉 남편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는 에르네스티네의 최고 전성기였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콘트랄토로 찬사를 받았다. 그는 퇴역장병들, 어린이들, 운전자 노동조합, 무주택자들을 위한 연주회를 가졌다. 오페라를 갈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연주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1926년 라디오에서 흘러나간 에르스티네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산타클로스보다 더 사랑을 받은 것이었다.

 

 레코딩한 음반을 듣고 있는 어네스트 슈만-하인크


 

에르스티네는 미모의 여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평범한 용모를 자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어머니상, 그러면서도 자녀들한테서는 불평을 듣는 그런 평범한 어머니상을 보여주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언젠가 그는 자기가 별로 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적 쾌락에서 멀리 할수 있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크리스티네 슈만-하인크는 1905년 마국으로 귀화하고 시카고의 변호사인 윌렴 라프(William Rapp)와 결혼하였다. 라프는 비록 에르네스티네보다 13년이나 연하였지만 그의 매니저로서 충실히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이혼하였다. 1910년에 그는 미국 서부지역에 순회공연을 갔다가 우연히 산 디에고(San Diego) 부근에 있는 큰 농장을 샀고 오렌지와 레몬이 자라는 이곳에 정착키로 결심했다. 그때쯤하여 크리스티네는 미국 전역에서 최고의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1915년 3월 22일, 크리스티네가 산 디에고의 발보아 파크(Balboa Park)로 이사 오는 날에는 주변지역 중고등학교 학생 6천명이 그의 장원에 모여 America라는 노래를 합창했고 마을 시장은 이 날을 슈만-하인크 데이로 정하고 그에게 명예 시민증을 증정하였다. 에르네스티네는 이데 대한 보답으로 3개월후 자기 정원에서 무료 음악회를 열기로 약속했다. 그날 슈만-하인크의 장원에는 2만7천명이 운집하였고 이 연주회는 그 해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San Diego Sun 신문은 슈만-하인크를 ‘영광 그 자체였다’고 보도했다. 몇 달후 그는 자기의 장원을 바이로이트와 같은 음악 페스티발의 장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17년 미국이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자 그의 음악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미국으로 귀화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으로서 남동생은 오스트리아제국 전함의 사령관이었고 아들은 독일 해군이었으며 두 여동생은 독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만-하인크의 신세계 미국에 대한 사랑은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제국에 대한 사랑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슈만-하인크는 미국을 위해 자기의 남을 정열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줄리앙 에드워즈의 '러브스 로터리 '(Love's Lottery)에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장병들을 위문하였고 자유채권 모금을 위한 적십자 자선 모임에 출연하였고 YMCA등을 통해서도 끊임없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어느때 그는 발보아 파크의 병영에 들려 아베 마리아(슈베르트)와 ‘신의 어린양’(비제)을 불렀다. 감격한 사단장은 즉석에서 그에게 사단휘장을 증정하고 명예 대령으로 임명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이던 1917년과 1918년에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디에고 시청앞 광장에서 ‘거룩한 밤, 고요한 밤’을 불렀다. 이날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슈만-하인크의 노래에 듣기 위해 무척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물론 모두들 독감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입에 마스크를 했다. 그래서 아주 조용한 크리스마스 이브 음악회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후인 1919년, 슈만-하인크는 발보아 파크에 전몰용사 기념관을 짓기 위한 모금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1936년 11월 17일 헐리우드의 자택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나 위대한 발할라(Vhlhalla)에 들어갔다. 에르네스티네는 더할수 없이 천부적인 성량과 더할수 없이 폭넓은 음역을 가진 성악가였다.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879년 드레스덴에서 레오노라(일 트로바토레)로였으며 마지막 공연은 70세 때에 메트로에서 였다. 그는 메트로 최고의 바그너 싱거로서 무대를 압도하였다. 그는 150 역할을 맡아한 기록을 세웠으며 그의 오페라 무대 경력은 54년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