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콘트랄토

비극적 인생 Ottilier Metzger (오틸리에 메츠거)

정준극 2008. 2. 28. 14:23
 

▒ 비극적 인생 Ottilier Metzger (오틸리에 메츠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콘트랄토중의 한사람인 오틸리에 메츠거(또는 공식적으로는 Ottilier Metzger-Lattermann)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생활하다가 마침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알려지자 세계는 경악과 함께 분노를 억제할수 없었다. 바그너 오페라의 히로인인 위대한 메츠거가 바그너를 숭상하는 나치에 의하여 비참한 죽임을 당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가? 모든 인간의 감성을 당황케 만드는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1943년 초겨울, 을씨년한 추위가 엄습하는 그 겨울날씨 속에 메츠거는 아우슈비츠에서 1년이 넘도록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온갖 모욕과 핍박을 마무리하며 인간소각로에서 한 가닥의 연기로 변하여 잿빛 하늘 높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이름, 그의 뛰어난 재능, 그의 찬란한 업적은 그의 비참한 죽음과 함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초, 메츠거는 레오 블레흐(Leo Blech)의 유명한 독일오페라단과 함께 미국 순회연주를 떠났다. 이때에 자이네마이어(Seinemeyer), 쇼르(Schorr), 키프니스(Kipnis)와 같은 당대의 오페라 아티스트들도 함께하였다. 공연은 성공이었고 메츠거의 이름은 온 미국을 열광케 했다. 1920년대 말, 메츠거는 가드스키(Gadski)이 이끄는 독일그랜드오페라단의 주역 멤버로서 다시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 역시 대성공이었다. 메츠거는 메트로와 시카고 등의 만류를 뿌리치고 1929년의 해가 저무는 때에 대서양을 건너 독일로 돌아왔다. 만일 그때 메트로나 시카고에 잠시 남아 있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땅의 여신 에르다(Erda)는 어찌하여 안개를 헤치고 나타나서 메츠거에게 독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을까? 유태계통인 메츠거는 베를린에 돌아와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히려 태연하였다. 그러나 나치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메츠거는 유태교 신앙을 버릴수 없어 브뤼셀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브뤼셀도 풍랑을 피할수 있는 안전한 포구가 아니었다. 1942년, 메츠거와 남편 라터만은 나치에게 검거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유태인 학살에 광분하여 있는 나치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해서 예외로 삼지 않았다.

 

카르멘

 

찬란한 음성과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고귀하고 위엄있는 모습의 오틸리에 메츠거는 187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성악 공부를 하였다. 메츠거는 18세때인 1898년 할레(Halle)에서 오페라에 데뷔한 이래 여러 곳에서 여러 역할을 맡으며 경력을 키워나갔다. 사람들은 그를 1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콘트랄토라고 하며 찬사를 보냈다. 메츠거는 쾰른에서 3년을 지냈으며 그후 함부르크의 주역 콘트랄토로서 기용되었다. 함부르크에서 그는 당시 최고의 성악가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중에는 카루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루소와 메츠거는 카르멘과 아이다에서 함께 공연하였다. 바그너의 역할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인 메츠거는 바이로이트의 초청을 받아 1901년부터 거의 매년 바그너에 출연하였다. 대표적인 역할은 지그프리트에서 에르다와 ‘신들의 황혼’에서 발트라우트였다. 그의 엄청난 레퍼토리에는 델릴라, 맛달레나(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아주체나(일 트로바토레), 브랑게네(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리카, 그리고 엘렉트라에서의 클리템네스트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그는 함부르크에서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유쾌한 형제’(Bruder Lustig: 1905), 블레흐(Blech)의 ‘봉인된 사람’(Versiegelt: 1908), 달베르(d'Albert)의 이즈옐(Izyel: 1909)의 세계초연에 출연하였다.

 

'로엔그린'에서 오르트루트

 

메츠거는 코벤트 가든에서도 갈채를 받았다. 코벤트 가든에서의 첫 역할은 맛달레나(명가수)였으며 살로메(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런던초연에서 헤로디아드를 맡기도 했다. 이밖에 그는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지히, 프라하, 오슬로, 취리히, 암스텔담, 뷔스바덴, 비엔나, 뒤셀도르프, 헤이그, 생 페테르부르크 등에서 수많은 역할을 맡아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10년 메츠거는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베이스-바리톤인 테오도르 라터만(Theodor Lattermann)이었다. 그로부터 메츠거는 자기 이름에 라터만을 연계하여 사용했다. 메츠거-라터만은 뛰어난 리사이틀리스트이기도 했다. 어느때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피아노 반주로 리사이틀을 가지기도 했다. 아마 이 위대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맡았던 피아노 반주였을 것이다. 오틸레 메츠거-라터만은 소프라노로도 분류되고 있다. 그만큼 음역이 상상외로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