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콘트랄토

몬트리올의 수퍼 디바 Maureen Forrester (모린 포레스터)

정준극 2008. 2. 28. 14:21
 

▒ 몬트리올의 수퍼 디바 Maureen Forrester (모린 포레스터)

 


1930년 캐나다의 몬트리올 빈민촌에서 태어난 모린 포레스터는 1950년대부터 30여년동안 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였으며 사회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한 위대한 콘트랄토이다. 그는 영연방인 캐나다의 자랑으로서 Dame 칭호를 받았으며 캐나다의 음악대사로서 세계를 주름잡았다. 그의 음성은 풍부하고 벨벳과 같이 부드러웠다. 그는 제2의 캐틀린 훼리어(Kathleen Ferrier)라고 불리고 있다. 캐틀린 스트워트(Kathleen Stewart)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비록 집안아 가난하였지만 어릴때부터 어머니의 지원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성악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여러 성당에서 솔로를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중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13세 때에 너무 가난하여 학비를 낼수 없게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하여 살림을 도왔다. 그는 비서, 안내원, 전화교환원 등의 일을 했다. 그러면서 조금 저축한 돈으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 16세 때에 바리톤 베르나르 디아망(Bernard Diamant)을 만난 것은 일대 포레스터에게 뜻깊은 전환기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포레스터는 디아망을 통하여 비로소 성악에 대한 이해에 절정을 이루었다.

 

 

1953년, 23세 때에 몬트리올 YMCA 대강당에서 가진 독창회는 성악가로서 첫 데뷔였다. 가난했기에 제대로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으며 힘든 직장생활만 했던 포레스터로서는 감격적인 독창회였다. 독창회는 신문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어 포레스터는 거장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교향악단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의 앨토 솔리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후 포레스터는 여러 후원단체의 지원으로 캐나다 주요 도시와 유럽에서 연주회를 가져 명성을 쌓게 되었다. 뉴욕 데뷔는 1956년 뉴욕 시민회관(Town Hall)에서였다. 마침 명지휘자 브르노 발터가 포레스터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말러의 교향곡 ‘부활’의 솔리스트로 초청하였다. 포레스터는 거의 1년동안 브르노로부터 말러에 대한 레슨을 받았다. 그리하여 1957년 세기적 브르노 발터의 은퇴 연주회에서 뉴욕필하모니와 함께 말러를 부르게 되었다. 카네기 홀에서였다. 실제로 브르노 발터는 말러 음악의 최고 해석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말러를 배운 포레스터 역시 말러가곡에 대한 당대 최고의 완성된 연주자로 인정을 받았다. 포레스터의 힘들이지 않는 테크닉, 뛰어난 독일어 딕션, 아무런 흠이 없는 드라마틱 센스는 독일 리더 연주회 최적이었다. 하지만 포레스터는 가곡보다도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공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놀랍도록 정력적이며 일관성이 있는 포레스터는 다섯 자녀를 키우면서도 세계 각국을 다니며 1년에 120여회의 연주를 가졌다. 이는 2-3일에 한번의 연주회나 오페라 공연을 가진다는 계산이므로 참으로 놀라운 열정을 볼수 있다.

 

 

포레스터의 오페라 출연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론토에서 ‘헨젤과 그레텔’에 출연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토론토와 퀘벡을 중심으로 여러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메트로 데뷔는 한참후인 1975년 ‘라인의 황금’에서 에르다(Erda)로였으며 1990년 라 스칼라 데뷔는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백작부인으로였다. 포레스터의 코미디 기질은 센드리용(신데렐라)에서 사악한 계모를 맡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역할은 대단한 인기를 끈 것이어서 그는 그후에도 이 역할을 오타와, 워싱턴, 파리,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지에서 맡아하였다. 한편, 포레스터는 연주회때 캐나다 작곡가의 작품을 반드시 포함시켰다. 특히 외국에서 연주회를 가질때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캐나다의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았다. 장 쿨타르(Jean Coulthard), 스럴 어빙 글릭(Srul Irving Glick), 해리 프리드만(Harry Freedman), 장 파피노-쿠뛰레(Jean Papineau-Couture), 머레이 샤퍼(Murray Schafer), 해리 소머스(Harry Somers) 등의 가곡은 포레스터가 처음 소개한 것들이다. 

 

 


1983년 포레스터는 캐나다 카운실의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5년동안의 임기동안 캐나다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번 맡은 일은 열심을 다하여 완성하는 것이 포레스터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 수많은 지역을 방문하여 연설을 하고 필요하다면 노래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은 캐나다를 위해 헌신하는 포레스터의 활동에 감동하여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86년 포레스터는 윌프리드 로리에 (Wilfrid Laurier)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교는 포레스터를 기려서 학교연주회장을 완성하고 The Maureen Forrester Recital Hall이라고 명명했다. 1995년에는 또 다른 영예가 포레스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론토 심포니가 포레스터 탄생 65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특별 초청하여 38년전 카네기 홀에 데뷔할 때 불렀던 말러의 ‘부활’을 다시 연주토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1990년에는 주노(Juno)명예의 전당에 클래식 음악가로서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와 함께 단 두명만이 입회되었다. 그는 각 학교로부터 거의 30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서 놀라운 은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