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루돌프 1세 (Rudolf I)

정준극 2008. 3. 27. 21:42

합스부르크를 반석에 올려놓은 루돌프 1세 (Rudolf I)

 

독일 슈파이어 대성당에 있는 루돌프1세 기념상


‘합스부르크의 루돌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루돌프1세(1218-1291)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중흥하여 반석위에 올려놓은 중심인물이다. 루돌프1세는 1273년 독일 왕(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같은 뜻이지만 바티칸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가지지 못한 예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말한다)으로 등극한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상을 독일의 여러 봉건 왕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가 되도록 크게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루돌프1세야 말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수 있다. 루돌프1세는 1218년 독일 브라이스가우(Breisgau)의 림부르크(Limburg)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백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알베르트4세(Albert IV)였으며 어머니는 키부르크(Kyburg) 백작인 울리히(Ulrich)의 딸 헤드비히(Hedwig)였다. [중세 독일에서 백작(Graf)은 대공(Duke)과 마찬가지의 영주를 말한다. 중세 이후 독일은 수많은 소영주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루돌프1세는 123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알사스(Alsace)와 아르가우(Aargau)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모두 상속받았다. 루돌프1세는 1245년, 27세 때에 호엔베르크(Hohenberg) 백작인 부르카르트3세(Burkhard III) 의 딸 게르트루데(Gertrude)와 결혼하였다. [호엔베르크는 독일의 군소공국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있는 공국이었다.] 이로써 루돌프1세는 슈봐비아(Swabia: 현재의 독일 남부와 스위스 일부) 지방에서 가장 막강한 영주가 되었다. 슈봐비아 지방은 합스부르크의 탄생지였다. 루돌프1세와 첫째 부인 게르트루데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인 알브레헤트1세(1255-1308)가 루돌프1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 및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의 대공이 되었다.

루돌프1세가 태어난 브라이스가우의 현재 전경 


루돌프1세의 할아버지가 되는 프레데릭2세(Frederick II) 황제는 독일 왕이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왕과 브루군디(Brugundy) 왕을 겸하고 있었다. 프레데릭2세는 명문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의 사람이었다. 루돌프1세는 어린 시절부터 프레데릭2세의 궁전을 자주 찾아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나중에 루돌프1세는 합스부르크 백작으로서 할아버지인 독일 왕 프레데릭2세와 그의 아들인(루돌프1세의 삼촌뻘이 됨) 콘라트4세(Conrad IV)에게 지극히 충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루돌프1세는 여러 영토를 하사받았다. 프레데릭2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이 된 콘라트4세는 시실리 왕국을 장악하였으며 계속하여 북부 이탈리아, 특히 롬바르디 왕국을 수중에 넣고자 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독일 접경 지역에는 교황의 영지가 있었다. 교황은 콘라트4세의 이탈리아 정책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콘라트4세를 견제하고 경계하였다. 루돌프1세는 합스 부르크 가문을 대표하여 콘라트4세의 이탈리아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교황은 독일 왕과 그에게 충성하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가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의 영지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여 전가의 보도인 파문을 휘둘렀다. 교황은 프레데릭2세, 콘라트4세, 그리고 루돌프1세를 파문하였다. 이로써 독일 왕인 프레데릭2세와 콘라트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갖지 못했으며 나중에 독일 왕으로 선출된 루돌프1세도 교황과 친선을 맺은후에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수 있었다. 즉, 독일 왕이라는 칭호는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가지지 못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루돌프1세의 대부라고 할수 있는 프레데릭2세 황제


독일은 오래전부터 여러 봉건 군주들의 분규로 혼돈에 있었지만 루돌프1세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루돌프1세는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영지를 확장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막강한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가 몰락하자 그들의 영지를 수용하였다. 슈타우펜(Staufen)왕조라고도 불리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인 바바로싸의 프레데릭, 헨리4세, 그리고 프레데릭2세를 배출한 대가문이다. 여기서 잠시 프레데릭2세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면 그는 1212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왕, 브루군디 왕, 그리고 시실리 왕의 칭호를 가졌다. 시실리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다. 프레데릭2세는 1220년 로마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루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키프러스(Cyprus)와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호칭을 인정받았다. 프레데릭2세는 교황의 처사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제6차 십자군을 주도하였다. 루돌프1세가 그러한 프레데릭2세의 총애를 받아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받았음은 비록 가문은 달랐지만 루돌프1세로서 장래에 환한 빛이 보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루돌프1세의 대관식이 거행된 아헨 대성당


루돌프1세의 출세가도에 부인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루돌프1세의 부인인 게르트루데(Gertrude)는 키부르크(Kyburg) 가문의 출신이었다. 게르트루데의 아버지인 키브루크 백작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삼촌인 하르트만6세(Hartmann VI)가 키부르크의 백작의 지위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하르트만6세도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게르트루데가 적법한 상속자가 되어 키부르크의 영토를 모두 물려받았다. 게르트루데의 키부르크 영토는 결국 루돌프1세의 소유가 되었다. 루돌프1세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와 바젤(Basel)의 영지를 관할하던 추기경들과 가문의 명예를 건 영토투쟁을 벌여 성공함으로서 이들의 영지까지 흡수하였다. 이로써 루돌프1세는 아버지인 알베르트4세로부터 물려받은 현재의 알사스 지역과 스위시 상당 지역의 영토를 합하여 막강한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루돌프1세는 명예와 부로서 유럽에서 무시 못할 당당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독일 왕으로 선출되어 명성을 떨치는 일만 남았다.

 

독일 바젤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루돌프1세의 첫부인 게르트루데의 석관 


1273년 9월, 선거후인 콘월(Cornwall) 왕 리챠드가 세상을 떠나자 독일의 군주들은 새로운 독일 왕을 선출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루돌프1세는 자신이 독일 왕에 선출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루돌프1세는 당시 55세였다. 그런 그가 신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실제로 몇 명의 강력한 후보들이 있었다. 가장 막강한 후보는 보헤미아 왕인 오토카르2세(Ottokar II)였다. 오토카르2세는 독일 왕이었던 필립의 외손자였다. 독일 왕 필립에게 유일하게 생존한 딸의 아들이 오토카르였다. 더구나 오토카르2세는 현직 보헤미아 왕이었으므로 동맹들이 많아 상당히 유력하였다. 루돌프1세를 독일 왕으로 선출되도록 하기 위해 처남인 호엔촐러른(Hohenzollern)의 프레데릭3세가 발 벗고 나서서 지원하였다. 이와 함께 루돌프1세 자신도 기왕에 후보에 들어가 있으므로 확실히 하기 위해 영향력 있는 라인 팔라틴(Palatine of the Rhine) 백작 겸 상부 바바리아 공작인 루이2세(Louis II)와 작소니(비텐베르크) 공작 알베르트2세를 자기의 사위로 맞아들이는 결혼 작전을 펼쳐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였다. 또 다른 후보자는 마이쎈(Meissen)의 프레데릭이었다. 파문당한 프레데릭2세의 손자였다. 그러나 마이쎈의 프레데릭은 아직 영지가 없었기 때문에 세력이 미약했다.

 

루돌프1세의 라이벌이었던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2세


독일 왕에 선출된 루돌프1세는 1273년 10월 24일 아헨(Aachen)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장엄하고 화려한 대관식이었다. 각지의 영주들과 제후들이 모두 참석하여 루돌프1세의 대관을 치하하였다. 훗날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는 ‘합스부르크의 백작’(Der Graf von Habsburg)이라는 소설을 통해 루돌프1세의 대관식 이후의 축제에 대하여 찬양의 글을 썼다. 독일 왕으로 즉위한 루돌프1세는 자기를 파문한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사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루돌프1세는 로마를 포함하여 교황청 영지, 그리고 시실리에 대한 독일제국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루돌프1세는 또한 교황의 의중을 존중하여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했다. 루돌프1세가 자기에게 순종한다고 믿은 교황 그레고리10세(Gregory X: 재위 1271-1276)는 루돌프1세를 정당한 독일 왕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루돌프1세의 선출에 불복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를 설득하여 더 이상 항의하지 못하도록 했다.

 

루돌프1세를 인정한 교황 그레고리10세


1274년 11월, 독일 제국의회(Diet of the Realm)는 뉘른베르크에서 회합을 가지고 프레데릭2세 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제후들이 다투어서 차지한 영토들을 원상복귀하도록 결정했다. 이와 함께 제국의회는 보헤미아의 오토카르가 독일 왕 루돌프1세에게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복종하도록 결정하였다. 오토카르는 프레데릭2세의 사후, 자기의 첫 번째 부인이 바벤버거 왕조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또 다른 바벤버거의 후계자인 바덴(Baden)의 헤르만6세(Hermann VI)와 분규를 일으켜 오스트리아, 슈티리아(Styria), 카린티아, 카르니올라(Carniola) 지방들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었다. 이에 루돌프1세는 오토카르가 바벤버거 왕조의 세습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내세우고 오토카르가 추가로 획득한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의 네 개 지방 영토를 당연히 독일 왕에게 원상복귀하라고 선언했다. 오토카르가 이에 불복하자 루돌프1세는 네 개 영토에 대한 오토카르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오토카르가 크게 반발하자 루돌프1세는 1276년 6월 오토카르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루돌프1세는 오토카르의 편에 있던 남부 바바리아의 헨리1세(Henry I)를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든후 전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몇 달후 루돌프1세는 오토카르가 소유하던 네 개 지방을 독일 왕의 소유로 만들었다. 다만 오토카르에게는 보헤미아 왕을 계속 맡도록 하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자기의 딸을 오토카르의 아들인 벤체슬라우스(Wenceslaus)와 결혼토록 했다. 이어 루돌프1세는 비엔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여 몇 년동안 머물면서 오스트리아,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에 대한 영향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루돌프1세의 문장(紋章)

 

루돌프1세는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로 만들며 아울러 오스트리아의 주위에 있는 슈티리아 등도 합스부르크의 소유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카린티아 등의 반발이 의외로 심심치 않아 어려움을 겼었다. 결국 루돌프1세는 1282년 아들들인 알베르트(Albert)와 루돌프(Rudolf)에게 각각 오스트리아와 슈티리아의 통치를 맡김으로서 일단 독일 제국의 동부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루돌프1세는 아들인 12세의 루돌프를 콘라트4세의 사후 통치자가 없던 슈봐비아의 대공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슈봐비아도 완전히 루돌프1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27세의 큰 아들 알베르트(1238-1295)는 티롤의 마인하르트(Meinhard)백작의 딸과 결혼하여 티롤까지 합스부르크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이어 루돌프1세는 1286년 카린티아를 완전히 장악하여 큰 아들 알베르트의 장인이 되는 마인하르트 백작에게 카린티아의 통치를 맡겼다. 독일 제국의 군주들은 루돌프1세가 원상복귀한 영토들을 자기의 아들들과 측근에게만 통치토록 맡기는 것을 반대하였다. 루돌프1세는 군주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루돌프1세는 눈을 서쪽으로 돌려 팔라타인 부르군디 백작인 필립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보토록 강요했다. 필립은 이를 거부하였다. 얼마후 필립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오토4세(Otto IV)가 뒤를 잇자 루돌프1세는 군대를 거느리고 팔라타인 브루군디에 진군하여 오토4세를 굴복시켰다. 루돌프1세는 그때까지 독일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거부해온 베른(Bern)시민들에게도 세금을 바치도록 했다.

 

 루돌프1세의 뒤를 이은 알베르트

 

루돌프1세는 1281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1284년 오토4세의 뒤를 이어 브루군디 공작이 된 휴고4세(Hugh IV)의 딸 이사벨라(Isabella)와 결혼하여 결국 브루군디도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안에 들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루돌프1세의 영향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워낙 오늘날의 독일은 당시 여러 군주들에 의해 분할통치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돌프1세는 바바리아, 프랑코니아, 슈봐비아 등지의 영토를 합스부르크에 정식으로 속하도록 칙령을 내렸지만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들의 반발이 심했고 후속조치를 마련하기 위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도 라인강을 따라 할거하던 이른바 ‘도적 기사’(Raubritter)들을 응징하고 상인들이 라인강을 자유롭게 왕래토록 해주었다. 라인강 연안의 영주들은 마치 강도와 마찬가지로 라인강을 운행하는 상인들로부터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이들을 '도적 기사'라고 불렀다. 

 

 프레데릭2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에 오른 콘라트4세


1291년 루돌프1세는 노쇠하여 독일 왕의 지위를 아들인 오스트리아 대공 알베르트(1255-1308)에게 이양했다. 일부 독일제국의 군주들이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반대했지만 루돌프1세는 모처럼 일구어 놓은 합스부르크의 기반을 잃고 싶지 않았다. 루돌프1세는 1291년 7월 15일 독일의 슈피아어(Speyer)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슈파이어 대성당(Spyerer Dom)에 안치되었다. 루돌프1세는 키가 크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우뚝 솟은 코가 특징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동정심이 있으며 관용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교황에게 파문당하였던 일, 영토를 넓히기 위해 무리하게 무력을 행사했던 일 따위는 그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것이었다. 단테는 신곡(Divine Comedy)에서 루돌프가 연옥(煉獄: Purgatory) 문밖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연옥에서는 루돌프1세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호되게 꾸짖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에 연옥에 당도한 루돌프1세와 친구들이 연옥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다. 단테의 신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