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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예술적 재능 Giovanni Battista Rubini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

정준극 2008. 3. 1. 23:09
 

▒ 탁월한 예술적 재능 Giovanni Battista Rubini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는 벨칸토 오페라의 가장 어렵고 복잡한 파싸지(passage)를 대단히 유연하게 처리할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전설적인 테너였다. 그는 이같은 재능으로 탁월한 예술적 해석과 감동적인 음악적 표현을 이루어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찬사를 받았다. 1794년 이탈리아 베르가모 부근의 로마노(Romano)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교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기초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12세 때에는 로마노대성당 성가대에서 여성 파트를 맡아했고 몇 년후에는 로마노극장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합창단원으로 출연하지 않을 때나 또는 막간에는 오케스트라석에 내려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얼마후 그는 우연히 로마노극장장과 음악감독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 로마노극장은 지방순회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연작품으로 정한 작품의 테너 아리아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마땅한 테너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비니가 자청하여 그 역할을 맡아 놀라운 재능으로 어려운 파싸지를 막힘없이 술술 풀어나갔다. 음악감독은 당장 루비니를 주역으로 발탁하였다. 그는 순회 오페라단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여러곳을 유랑하다가 바라바야(Barbaja)라는 흥행주의 눈에 띄어 나폴리, 로마, 팔레르모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오페라에 출연할수 있게 되었다. 루비니의 공연은 날이 갈수록 대단한 인기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루비니의 이름을 연호하며 극장을 떠날 줄을 몰랐다. 1819년 그는 당시에는 인기가 높았던 메조소프라노인 아델라이데 초멜(Adelaide Chomel)과 결혼하였다. 이 또한 상당한 얘기꺼리여서 바야흐로 루비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1825년 그는 파리의 이탈리아극장(Theatre Italien)과 계약을 맺어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에 출연하였다. 그의 재능을 여실이 과시할수 있는 무대였다. 루비니의 ‘라 체네렌톨라’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로시니 전용 테너로서 비엔나, 나폴리, 밀라노의 무대를 압도하였다. 당시 그에게 지불된 출연료는 놀랄정도로 어느 소프라노보다도 높은 금액이었다. 그만큼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정상에 오른 그는 얼마후부터 벨리니의 오페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야말로 벨리니의 몽유병자, 청교도 등을 빛낸 수퍼 테너였다. 나중에 벨리니는 루비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오페라를 작곡할 정도였다. 그의 강렬한 표현력은 도니제티와 같은 작곡가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 도니제티도 벨리니와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안나 볼레나, ‘람메무어의 루치아’ 등은 실로 루비니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루치아에서 에드가르도를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정이 맞지 않아 1835년 나폴리 산 카를로에서의 세계초연에는 테너 길베르-루이 뒤프레(Gilbert-Louis Duprez)가 에드가르도를 맡았다. 원래 루치아의 초연은 그해 7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9월에 가서야 겨우 가능했었다. 게다가 당시 마침 산 카를로가 파산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공연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1831년부터 12년 동안, 그는 파리와 런던을 중심으로 오페라와 콘서트 활동을 하였다. 그는 당시 유명한 ‘청교도 4인’의 멤버였다. 이 클럽의 다른 멤버는 그리시(Grisi), 탐부리노(Tamburino), 라블랑슈(Lablanche)였다. 그후 그는 피아니스트 리스츠와 함께 네덜란드, 독일 등을 여행하며 합동연주회를 가졌다. 얼마후  그는 베를린 연주를 마치고나서 피아노 반주자인 리스츠와 헤어져 러시아의 생 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다. 그는 제정 러시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그의 팬이었으며 황제 짜르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844년, 그는 잠시 이탈리아와 비엔나에서 공연을 가진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목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듬해인 1845년 그는 이미 나이 50에 접어들어 더 이상 무대를 고집할수 없게 되었다. 은퇴를 결심한 그는 러시아 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 로마노로 돌아와 그동안 저축한 재산으로 커다란 장원을 마련하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미 백만장자였다. 고향에서 지낸지 8년만인 1854년 그는 많은 재산을 남기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루비니가 최고의 인기를 누릴수 있었던 것은 그의 찬란한 음성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음성을 콘트롤할줄 알았다. 그는 비록 천부적인 연기력이 부족하여 무대에서 뛰어나지 못했지만 목소리로 모든 부족함을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음성은 웅장한 힘에 넘쳤으며 순수하고 또한 감미로웠다. 아마 역사상 어느 어느 누구도 그의 놀랄만한 음성에 필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폭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었다. 베이스 악보의 C 음에서부터 두 옥타브에 걸친 음역이었다. 그는 또한 활세토로서 하이 F 음까지 낼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발성 테크닉 때문에 그가 과연 어느때 활세토를 사용했는지 구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당시 벨칸토 시대에 있어서 무대에서의 연기는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노래가 우선이었다. 그러므로 루비니의 맑고 순수하여 힘에 넘친 음성은 갈채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가 은퇴한 후에는 그의 노래를 모방하여 부르는 것이 최고의 박수를 받는 첩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