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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자부심 Giovanni Apostolou (조반니 아포스톨루)

정준극 2008. 3. 1. 23:08
 ▒ 그리스의 자부심 Giovanni Apostolou (조반니 아포스톨루)

 

 조반니 아포스톨루


그리스 출신의 위대한 테너 조반니 아포스톨루는 아테네에서 1890년 (어떤 자료에는 1863년, 또 다른 자료에는 1866년) 이오아니스(Ioannis, Yannis, Yango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포스톨루는 그리스 출신의 남성 성악가로서는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인물이다. 다행하게도 그의 음성은 초기 음반으로 남아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10세 때라는 주장이 있음) 당시 그리스 왕국의 올가(Olga)왕비가 설립한 궁정성당 합창단원으로 스카웃되어 활동할 정도로 아름답고 순수한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음악원을 나왔지만 당장 생활을 위해 아테네 지방법원 서기보조원으로 직장생활을 했으며 얼마후에는 정부기관지인 ‘아테네 프레스’ 신문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생활이 넉넉지 못했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그룹을 만들어 아테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런 거리의 성악가들을 ‘세레나데 성악가’라고 불렀다. 그가 본격적인 성악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그는 아테네 대성당 성가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자선음악회 등에서 노래를 부르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888년  3월 그리스 작곡가인 신다스(Xyndas)의 ‘국회의원 후보자’라는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함으로서 오페라 무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 공연으로 인정을 받은 그는 그로부터 계속 오페라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해 가을에는 나폴레옹 람벨르(Napoleon Lambelet)라는 작곡가가 쓴 ‘물방앗간 사람’(E Mylonáthes)에 출연하여 사랑을 받았고 이어 코미디힐리온(komidhyllion: 일종의 그리스 스타일의 뮤지컬 코미디)에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1888년은 아포스톨루가 최고로 바쁜 해였다. 그해 12월에는 도니제티의 베틀리(Betly, 또는 La Capanna Svizzera)에서 다니엘(Daniel)을 맡아 다시한번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듬해부터 그는 엘리니코 멜로드라마(Elliniko Melodrama)라는 이름의 순회오페라단과 함께 그리스 주요 도시에서 ‘국회의원 후보자’ ‘베틀리’를 주로 공연했으며 여기에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피’(벨몬테), 파블로스 카레르(Pavlos Carrer)의 마르코스 보짜리스(Markos Botsaris)의 타이틀 롤, 라 화보리타의 훼르단도, 루치아의 에드가르도, 몽유병자의 엘비노(Elvino),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알마비바 백작 역할을 레퍼토리에 추가하였다. 그의 이름은 점점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리하여 이듬해에는 순회오페라단과 함께 이집트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터키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플), 스미르나(Smyrna) 등에까지 방문하여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이 순회오페라단은 1889년에 대원정의 길에 나서서 마르세이유(프랑스), 트리에스테(이탈리아), 갈라츠(루마니아), 오데싸(러시아)등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이 오페라단은 무리한 경영으로 오데싸에서 파산하고 말았다. 아포스톨루를 사랑하는 오데싸와 부쿠레슈티의 그리스 사람들은 돈을 모아 아포스톨루가 이탈리아에서 더 연수를 받을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리스의 유명한 작곡가 스피로스 사마라스(Spyros Samaras)가 아포스톨루를 밀라노의 이름난 성악교사인 펠리체 포쪼(Felice Pozzo)에게 적극 소개해 주었다. 포쪼 문하에서 6개월간 오페라에 전념한 아포스톨루는 노래와 연기에 있어서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충분히 소화할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스승인 포쪼는 아포스톨루기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여 1890년 베니스에서 데뷔할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운명의 힘’에서 알바로(Alvaro)였다. 아포스톨루의 알바로는 좋은 평을 받았다. 베니스의 신문들은 ‘이제야 제대로 된 베르디 테너를 만나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후 아포스톨루의 인기는 정상을 향하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의 오데싸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데싸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몇 년전의 아포스톨루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포스톨루는 거의 5년 이상을 오데싸에서 출연하였다. 나폴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나폴리에서는 주로 산 카를로와 메르카단테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얼마후 로마의 테아트로 아르젠티나(Teatro Argentina)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를 맡은 것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움베르토 1세 국왕이 아포스톨루를 개별적으로 초청하여 국왕의 별장에서 모든 귀족과 외국 사절들을 위한 연주회를 갖도록 했다. 움베르토 국왕은 아포스툴로에게 훈장과 다이아몬드 핀을 주었다.


그러한 그가 어느날부터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1901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05년까지의 행적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는 있을 뿐이다. 죠반니 아포스톨루는 1905년 8월 나폴리에서 한창 나이인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성은 감미롭고 힘에 넘쳐 있으며 듣는 사람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것이었다. 또한 ‘명확하고 때묻지 않았으며 독특한 정서가 깃들여 있다. 어떤 때에는 마치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마력적이다’라는 평도 받았다. 아포스톨루는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그리스의 영원한 자랑이며 자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