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최고의 바리-테너 Herman Jadlowker (헤르만 야들로브커)

정준극 2008. 3. 1. 23:21
 

▒ 최고의 바리-테너 Herman Jadlowker (헤르만 야들로브커)

 

 

헤르만 야들로브커는 20세기 테너 중에서 가장 특이한 케이스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가 남긴 음반을 들어보면 약간 바리톤 음색을 느낄수 있다. 하지만 그는 테너로서의 고음을 매우 쉽게, 그리고 믿을수 없을 만큼 경쾌하게 내어 즐거움을 던져 주었다. 그는 아리아를 아름다운 장식음과 함께 유연하게 불르는 재능이 있었다. 한편 Fuor del mar와 같은 아리아는 콜로라투라 스타일로 불러 기쁨을 주었다. 야들로브커의 음성과 테크닉은 독특하였다. 얼마나 많은 테너가 하루 저녁에 로엔그린과 오텔로를 부를수 있으며 그 다음날에는 알마비바 백작과 프라 디아볼로(Fra Diavolo)를 부를수 있는가? 그리고 이 네 역할을 뚜렷하게 특색있는 음색으로서 부를수 있는가? 야들로브커는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뛰어난 재능은 그가 세상을 떠난후 거의 60년 동안 조용히 잠자고 있었다. 어찌하여 그런가?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밖에 해석할수 없다. 그의 찬란한 음성은 벨칸토 작품에 최적이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베리스모가 무대를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그의 바리톤적 요소와 놀랄만한 비르투오조 능력으로는 베르디의 오텔로보다 로시니의 오텔로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음성은 바리톤과 테너를 믹스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의 음성을 굳이 성악적 장르로 분류한다면 바리테너(Baritenor)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야 할것이다. 나중에 음악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로시니의 테너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리릭이나 드라마틱 테너가 아니라 바리톤의 기질을 지닌 테너, 즉 바리테너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참으로 불운하였던 것은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 바리테너를 필요로 하는 로시니의 작품들이 서서히 유행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50년동안 바리테너는 완전히 잊혀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것은 음반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플로토우의 알렛산드로 스트라델라의 아리아, 오버(Auber)의 La Muette de Portici와 Dia Fravolo의 아리아,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 아리아,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아리아 등이 음반으로 남아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프리다 헴펠과 부른 위그노의 두엣, 요셉 뫼들링거(Joseph Mödlinger)와 부른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의 듀엣이 있다는 것도 크나큰 다행이다.


야들로브커는 1877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 시절, 유태교 회당의 성가지휘자로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전문직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그는 오페라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태교 회당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가장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무대 생활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다. 유태인으로서 러시아(당시 라트비아는 러시아의 속국이었음)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친 그는 가출하여 비엔나로 갔다. 아버지는 비엔나의 유태인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아들 야들로브커를 불법입국자로 당국에 고발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늙은 아버지는 결국 아들에게 졌다.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한 아들에게 비엔나로 가서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그리하여 비엔나음악원에서 4년을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9년 쾰른에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어떤 오페라에 데뷔하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는 원래 쾰른에서 3년을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쾰른오페라의 총감독이 유태인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3년 계약은 1년만에 해약되었다.  그는 고향 리가로 돌아가 4개 시즌을 활동했다. 그의 리가 데뷔는 유태 여인(La Juive)에서 레오폴드였다.


리가에 머무는 동안 그는 비교적 가벼운 역할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예를 들면 ‘하얀 옷의 부인’, ‘자킹겐에서 온 나팔수’(Der Trompeter von Sakkingen),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서의 테너 주역, 발터(탄호이저), 알마비바(세빌리아의 이발사), 토니오(팔리아치), 렌스키(유진 오네긴),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 로미오(로미오와 줄리엣), 마르키스(황제와 목수), 돈 오타비오(돈 조반니), 파우스트, 호프만(호프만의 이야기), 타미노(마적), 프라 디아볼로 등등이다. 고향 리가에서 젊은 야들로부커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라트비아에도 이런 테너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 역할을 볼때 그는 기본적으로 리릭 테너로부터 시작한 것을 알수 있다. 그러는 중에 브레스라우(Breslau)와 칼스루에(Kalsruhe)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겼다. 브레스라우는 실패였으나 칼스루에는 성공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나중에 칼스루에에서 오래동안 출연할수 있었다. 


1903년, 그는 리가상인의 딸인 안나 호츠(Anna Hotz)와 결혼하여 1940년 안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년간 평탄한 결혼 생활을 했다. 그는 1906년까지 리가에 머물면서 독일의 다른 극장에 객원 출연하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유럽에서는 어떤 성악가가 어떤 극장과 계약을 맺으면 당연히 그 극장에서만 공연해야 하지만 1년에 3개월 정도 휴가를 가질수 있으므로 이 휴가기간 동안 다른 극장에서 출연할수 있었다. 때문에 성악가들이 이곳저곳에서 출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리가오페라단으로부터 긴 휴가를 받았었는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칼스루에에서 비교적 장기간 머물러 있으면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야들로브커는 1909년 리가오페라와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이듬해 1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506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메트로에도 출연하고 다른 도시 순회공연도 가졌다. 1910년 1월 22일의 메트로 데뷔는 파우스트였다. 며칠후인 2월 11일 그는 로엔그린을 불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에는 에미 데스틴(Emmy Destin)의 상대역으로 투리두(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불렀다. 그후 그는 거의 1주일마다 새로운 역할로서 무대에 섰다. 제랄딘 화라와 함께 토스카를, 요한나 가드스키(Johanna Gadski)의 상대역으로 ‘마탄의 사수’를, 그 다음주에는 팔리아치를, 또 그 다음주에는 다른 역할로서 무대에 섰다. 이어 그는 메트로와 함께 전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볼티모어, 피츠버그, 톨레도, 디트로이트, 밀워키,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 루이빌 등등이었다. 켄터키의 루이빌에서는 트윈 빌(Twin Bill: 2편 동시공연. 주로 카발과 팔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해에 메트로는 파리 공연을 위해 프랑스를 방문했다. 카루소와 야들로브커가 함께 갔다. 5월 21일, 샤틀레극장에서의 공연은 카발(카벨레리아 루스티카나)과 팔리(팔리아치)의 트윈빌(2본 동시공연)이었다. 카발에서의 투리두는 야들로브커가 맡았고 팔리에서의 토니오는 카루소가 맡았다. 지휘는 유명한 토스카니니였다.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대성황의 공연이었으며 수없는 커튼콜을 받은 대성공의 공연이었다.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끝낸 그는 메트로와 떨어져 독일에 잠시 들려 초청공연을 가진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라운 열정의 테너였다. 예를 들어, 12월 초순의 어느날, 메트로에서 제랄딘 화라와 함께 마티네(오후 공연)를 가졌고 바로 그날 저녁 같은 장소에서 공연된 ‘황금서부의 아가씨’(푸치니)의 세계초연에도 출연하였다. 이 세계초연에는 카루소와 에미 데스틴이 주역을 맡았으며 지휘는 토스카니니였다. 그로부터 18일후, 메트로는 또 다른 세계초연을 가졌다. 훔퍼딩크의 ‘임금님의 아이들’(Die Königskinder)이었다. 이번에는 야들로브커와 제랄딘 화라가 이 세계초연의 주인공이었으며 지휘는 역시 토스카니니였다. 1912년 3월 13일, 야들로브커는 핀커튼(나비부인)으로서 메트로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가진후 독일로 돌아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어느해, 러시아의 니콜라이 짜르(황제)가 베를린의 빌헬름 카이저(황제)를 방문했다. 카이저는 짜르를 위해 로엔그린을 공연했다. 이날 저녁의 영광된 타이틀 롤은 야들로브커였다. 카이저가 짜르에게 로엔그린을 독일의, 즉 자기의 로엔그린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짜르는 ‘로엔그린이 당신의 것일지는 몰라도 무대에서의 로엔그린은 나의 백성이올시다’라고 대꾸해 주었다고 한다. 야들로브커의 출신국인 라트비아가 러시아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몇 년을 더 지내면서 오페라 이외에도 오라토리오와 오페레타에 출연하여 존경과 인기를 끌었다. 야들로브커는 1929년 리가로 돌아왔다. 라트비아의 유태교 본부 회당은 그를 찬양총감독으로 선출했다. 그는 또한 1936-38년 리가대학교의 음악교수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반유태인 구호가 벽에 써있기 시작하던 때였다. 야들로브커는 친척들이 있는 팔레스타인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마침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부인과 함께 가까스로 유럽에서 탈출할수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대학교의 음악교수가 되었다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지 1년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텔아비브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개인 성악교실을 차렸다. 전쟁이 아직도 한창이며 수많은 유태인들이 히틀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때인 1943년 그는 텔아비브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공연하여 주역을 맡았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텔아비브에서 그는 한편으로 팔레스타인오페라단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대받는 유태인을 위한 자선음악회에 솔선하여 출연하였다. 유태인 돕기 자선음악회 출연은 1953년 5월 13일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