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자신감이 자산 Hipólito Lázaro (이폴리토 라자로)

정준극 2008. 3. 1. 23:23
 

▒ 자신감이 자산 Hipólito Lázaro (이폴리토 라자로)

 

 

이폴리토 라자로는 젊은 시절 한창때에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테너로서 카루소의 후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국인 스페인에서 ‘테너의 투우사’(Tenor-Torero)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 넘친 음악활동을 했다. 그는 마치 성당의 종탑에서 종이 울리는 것처럼 맑은 고음을 냈다. 아무리 높은 음역(Tessitura)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자신만만했다. 어느때에는 오페라 공연중 오케스트라 바로 앞의 무대까지 나와서 ‘친애하는 오페라 애호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세계 넘버 원 테너를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일도 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과 남미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지만 카루소의 대체하는 후계자로서 영원히 인정받지는 못했다. 라자로는 카루소보다 더 최고의 테너가 되기 위해 올라가려 했으나 베리스모에만 집착하여 카루소의 그늘에 머물러야했다.


라자로는 1887년 바르셀로나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에 무한한 여정을 가졌지만 ‘세계적 테너가 되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라는 생각에 정식으로 성악을 공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노래 솜씨는 마을에 널리 알려져 주민들의 성화에 못이겨 18세 때에 마을 극장에서 두편의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아리에타(Arrieta)의 마리나(Marina)와 비바스(Vivas)의 보에미오스(Bohemios)였다. 이 두 작품에서 테너의 역할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젊은 라자로는 그 어려운 테너 역할을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탁월하게 해냈다. 마을 사람들은 라자로에게 정식으로 오페라를 공부하여 대도시의 오페라 무대를 모두 점령하라고 권했다. 이쯤되자 라자로는 ‘그래!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에 바르셀로나로 나가 레슨을 받았다. 한창 공부에 전념하려던 중 마침 스페인-모로코 전쟁(1909-1911)이 일어나자 라자로는 입대하여 군인성당에서 색소폰을 불었다. 1910년, 23세의 나이로 제대한 그는 바르셀로나의 작은 극장에서 도니제티의 ‘라 화보리타’에 주역 출연하여 환호를 받았다. 그의 음성은 아름다웠으며 힘이 있었다. 그는 이어 리골레토, ‘아프리카의 여인’(마이에르베르), 일 트로바토레, 카르멘, 아이다, 토스카에 출연하여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아름답고 힘있는 음성을 가지고 있으며 타고난 무대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정식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페라 테너로서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음을 만들어 내는 테크닉이 부족하였다. 라자로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밀라노로 떠났다. 라자로는 유명한 엔리코 코티(Enrico Cotti)의 레슨을 받았다. 그의 이탈리아 데뷔는 1910년대 말, 훼라라(Ferrara)에서 리골레토였다.


라자로의 전문경력은 1911년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Teatro dal Verme)에서 라 보엠, 그리고 로마의 테아트로 코스탄치(Teatro Costanzi)에서 리골레토에 출연함으로서 시작되었다. 특히 1913년 제노아의 테아트로 카를로 휄리체(Teatro Carlo Felice)에서 마스카니 자신의 지휘로 공연된 마스카니의 이사보는 그를 정상으로 향하게 해준 발판이었다. 마스카니는 이사보에서 보여준 라자로의 재능에 무척 감동하였다. 마스카니는 1913년 라 스칼라에서의 파리시나(Parisina) 세계초연에 라자로를 주역으로 기용하였다. 마스카니는 테너로서 라자로의 스태미나와 고음을 얼마든지 끄는 재능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라자로는 마스카니의 역할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는 테너로서 평판을 받았다. 이후 라자로는 이탈리아에서 마스카니 전용 테너로서, 나아가 가장 탁월한 베리스모 테너로서 이름을 날렸다. 음악계는 라자로를 전설적인 죠반니 바티스타( 루비니Giovanni Battista Rubini: 1794-1854)에 버금하는 강력하고도 빛나는 테너라고 찬사를 보냈다.  


계속하여 라자로는 미국, 남미, 이집트, 제노아 등지에서 푸치니의 ‘황금서부의 아가씨’, 마농 레스코, 나비부인,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그리고 말할 나위도 없이 마스카니의 파리시나, 이사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출연함으로서 베리스모의 대가로서 명성을 굳혔다. 라자로는 심지어 바그너에도 도전하였다. 1914년 리오 데 쟈네이로에서 탄호이저에 등장한 것은 좋은 예였다. 19115년 그는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청교도의 탈보트경(Lord Talbot) 역할을 맡았다. 이후 탈보트는 그의 등록상표와 같은 역할이 되었다. 메트로에서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1918년 메트로에서 만토바 공작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이폴리토 라자로의 이름은 당장 뉴욕을 휩쓸었다. 그는 메트로의 만류로 1920년까지 머물면서 무대를 빛냈다. 그러나 당시 리릭-스핀토로서 혜성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카루소의 그늘에 가려 더 이상 앞길을 열어가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은 1921년 로마에서 마스카니의 일 피콜로 마라트(Il Piccolo Marat)의 세계초연에 출연한 것이었다. 라자로를 위해 마련된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