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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의 국민적 영웅 Jacques Urlus (자크 울루스)

정준극 2008. 3. 2. 16:53
 

▒ 화란의 국민적 영웅 Jacques Urlus (자크 울루스)

 

 

카루소와 동년배인 자크 울루스(1867-1935)는 메트로에서 5년동안 카루소와 분장실을 함께 쓴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당대의 로리츠 멜키오르와 함께 최고의 독일 영웅테너로 인정받은 뛰어난 테너였다. 그는 독일과 벨기에의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인 헤르겐라트(Hergenrath)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화란인이었다. 그러므로 자크 울루스가 벨기에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화란인이다. 그는 청년시절에 음악을 공부할 일이 없다. 대신 집안 살림을 위해 부근 도시의 철공장에서 일하였다. 다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간혹 마을합창단에 나가 어울리곤 했을 뿐이었다. 그의 성악적 진면목이 발견된 것은 그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어떤 장교가 울루스의 노래를 듣고 감동하여 자기가 울루스의 레슨비 전액을 부담하겠으니 성악공부를 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악공부에만 전념하게 되면 다른 벌이를 할수 없으므로 울루스는 이 고마운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트로바토레


1892년, 화란국립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을 만난 것은 울루스의 경력에 일대 전환점이 된 것이었다. 음악감독은 울루스의 재능을 보고 당장 오페라 출연을 주선해주었다. 울루스는 자기는 정식으로 성악공부를 한것도 아니며 더구나 오페라 출연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고 사양했지만 ‘무조건 한번 해 봐라!’는 권고에 따라 팔리아치에서 베페(Beppe)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그후 울루스는 용기를 갖고 유명한 성악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레슨을 받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발성 테크닉에 있어서는 거의 독학이었다. 1898년 울루스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에 초청을 받았다. 독일어 대사에 따른 공연을 배우도록한 배려였다. 그 전까지 울루스는 화란어로 번역된 바그너 작품만을 공연했었다. 그러므로 바그너 음악을 진정으로 해석하려면 독일어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울루스에게 독일어 대본을 익힐 기회를 준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계약기간보다 일찍 화란으로 돌아왔다.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울루스가 일찍 떠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록 울루스가 당대 최고의 바그너 테너였지만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그와 공연계약을 맺지 않았다.

 

지그프리트


울루스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주도적 영웅테너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바이로이트와 어색한 관계였지만 라이프지히와는 원만한 관계여서 1914년까지 공연계약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그의 명성은 온 유럽에 전파되었다. 결과, 베를린, 비엔나, 런던에서 초청을 받았으며 1912년에는 메트로의 초청을 받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하게 되었다 (첫날 공연은 악몽과 같았다. 왜냐하면 먼 여행길에 지독한 감기에 걸려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며칠후의 두 번째 공연부터는 그의 빛나는 음성이 뉴욕의 창공을 힘차게 수놓았다. 그는 메트로에 머물면서 주로 트리스탄을 맡았으며 상대역인 이졸데로는 유명한 릴리안 노르디카, 요한나 가드스키, 즈덴카 화쓰벤더, 멜라니 쿠르트, 릴리 레만 등이었다. 이밖에도 메트로에서 아돌라르(Adolar), 삼손, 타미노 등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울루스는 메트로에 남아있어 달라는 간곡한 청탁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로엔그린


1922년 그는 다시 메트로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여 바그너의 오페라에 출연함으로서 옛날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때 울루스의 나이는 이미 55세였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나이에 관계없이 계속 활동을 하였다. 마지막 오페라 공연은 63세 때에 바르셀로나에서 트리스탄을 맡은 것이었다. 같은해에 그는 암스테르담에서의 갈라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콘서트 테너로서 수많은 활동을 하였다. 베를린에서의 콘서트는 가장 성공적이었다. 유명한 소프라노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가 찬조 출연한 베를린 콘서트는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연주회로 기억되고있다. 1935년 그는 화란의 노르드위크(Noordwijk)라는 마을에서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 화란국민이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여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지그프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