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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라니의 그랑디 테노리 Jaume Argall (하우메 아르갈)

정준극 2008. 3. 2. 16:54
 

▒ 카탈라니의 그랑디 테노리 Jaume Argall (하우메 아르갈)

 

 

스페인의 테너 하우메 아르갈(Giacomo Aragall이라고도 함. 자코모는 무대를 위한 이탈리아식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하우메[Jaume]임. 그리고 프랑스식으로 젬[Jaime]이라고 표기하기도 함)는 1939년 카탈라니 지방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과 9세때에 바르셀로나의 산타 마리아 델 마르(Santa Maria del Mar)성당 합창단에 들어가 다른 기성 성악가들과 함께 찬양을 했다. 우수한 성악적 자질을 인정받은 그는 19세 때부터 젬 프란치스코 푸이그(Jaime Francisco Puig)에게서 성악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푸이그는 몇 년후 호세 카레라스도 가르친 훌륭한 성악교사였다. 1961-62 시즌에 아르갈은 바르셀로나의 리체우극장에서 콤프로마리오로서 데뷔하였다. 처음에 맡은 역할은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아르투로(Arturo)였고 이어 팔리아치에서 알레퀴노(Arlequino)를 맡았다. 리체우 극장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장학금을 주어 밀라노에서 공부를 계속할수 있도록 했다. 얼마후 그는 부세토의 베르디성악콩쿠르에서 당당히 우승하여 놀라운 주목을 끌었다. 이같은 성공으로 그는 1963년 9월, 베니스의 라 훼니스(La Fenice)극장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예루살렘’에서 주역인 가스톤(Gastone)을 맡아 찬사를 받았다. 같은해 12월, 그는 대망의 라 스칼라에서 ‘친구 프릿츠’의 타이틀 롤을 맡게 되었다. 그는 라 스칼라에서 다음해에 힌데미트의 카르디약(Cardillac)에서 카발리에(Il Cavaliere)와 푸치니의 라 보엠에서 로돌포를 맡아 성공을 거두어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라 스칼라를 정복한 아르갈은 1964-65년 시즌에 바르셀로나의 리체우로 돌아와 라 보엠으로 고향에 대한 보답을 하였으며 이어 부다페스트, 베니스, 제노아, 팔레르모, 파르마, 모데나, 나폴리, 로마, 토리노 등지의 열화와 같은 출연요청에 따라 주로 베르디와 푸치니를 불러 위대한 테너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1966년은 그에게 매우 뜻깊은 해였다. 그는 라 스칼라의 초청으로 벨리니의 ‘캬풀레티가와 몬테기가’에서 주역인 로미오를 맡았기 때문이다. 상대역인 줄리에타는 유명한 레나타 스코토였으며 당시 신예인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로미오의 친구 역으로 출연하였다. 이 공연을 지휘한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아르갈에 대하여 ‘놀라운 미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벨리니의 이 오페라에서 로미오는 악보에 있는대로 지금까지 메조가 맡았었다. 그러던 것이 아르갈로부터 처음으로 테너가 맡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같은 해에 아르갈은 비엔나 슈타츠오퍼에 로돌포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고 이듬해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리골레토의 만투아 공작을 맡아 공전의 갈채를 받았다. 1968년 아르갈은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Teatro Real)의 재개관 기념 공연에서 만투아 공작을 맡아 국왕으로부터 스페인을 빛낸 테너로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그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체코 공화국, 그리고 스페인의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고향인 바르셀로나에서는 거의 1백회 이상의 공연에 주역으로 참여했다. 주로 출연한 작품은 라 보엠, 람메무어의 루치아, 나비부인, 라 화보리타, 라 트라비아타, 베르테르, 도니제티의 카테리나 코르나로(Caterina Cornaro), 파우스트, 토스카, 마농, 돈 카를로, 아드리아나 르쿠브로, 가면무도회, 시몬 보카네그라 등이었다. 아르갈은 아마도 지난 50년간에 걸쳐 스페인이 배출한 가장 세련되고 가장 아름다운 음성을 가진 테너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아르갈의 이름은 그의 재능과 능력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같은 다른 스페인의 테너들은 삼척동자라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입장이지만 자코모 아르갈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널리 홍보되는 것을 수줍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순진한 테너였기에 매스콤을 타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아르갈의 뛰어난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공연을 직접 본 사람들, 또는 그의 음반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의 한점 흠이 없는 완벽한 스타일, 고음이던 저음이던 아주 쉽게 낼수 있는 발성적 재능, 비단과 같이 아름다운 음성을 잘 알고 있다. 1991년 무대에서 은퇴한 그는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으며 한편 노익장을 과시하며 콘서트 연주를 하는가 하면 국제성악콩쿠르를 주선하는 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1994년부터 그가 마련한 Concurso de Canto Jaume Aragall은 이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