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폴란드의 전설 Jean de Reszke (장 드 레즈케)

정준극 2008. 3. 2. 16:54
 

▒ 폴란드의 전설 Jean de Reszke (장 드 레즈케)

 


3남매가 모두 뛰어난 성악가로 활동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경우는 참으로 흔한 일이 아니다. 폴란드 출신의 레즈케 3남매의 경우가 그렇다. 형인 장 드 레즈케는 당대의 테너였고 동생 에두아르 드 레즈케는 뛰어난 베이스-바리톤이었으며 여동생 죠세핀 드 레즈케는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소프라노였다. 뿐만 아니라 형인 장 드 레즈케의 부인 마리 드 레즈케도 소프라노였다. 이들의 이름이 프랑스 스타일인 것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활동했기 때문에 편의상 장, 에두아르, 죠세핀 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며 그러다가 아예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들의 이름은 얀(Jan), 에드바르트(Edward), 요제피나(Józefina)였고 성(姓)은 미에치스라브(Mieczislaw)였다. 이들은 모두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제국의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며 활동했다.

 

트리스탄

 

장 드 레즈케는 1850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철도조합장이었으며 어머니는 아름다운 음성을 가진 교양있는 부인으로서 간혹 개인적인 연주회에 등장하여 노래 부르기도 했다. 어찌보면 장은 음악적 가정에서 성장했다고도 볼수 있다. 장 드 레즈케의 부인 마리가 그 옛날 레코드가 실린더 형태였을 때 노래를 취입한 것은 역사적 유물로 남아있다. 더구나 마리의 노래는 남편인 장이 피아노 반주를 했다. 장은 피아노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장은 처음에 바리톤으로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는 바르샤바와 밀라노에서 훌륭한 성악 선생님 문하에서 레슨을 받았다. 그러다가 막내 동생 에두아르가 ‘형은 바리톤이 맞지 않아! 테너야! 테너!’라고 하면 방향전환을 하라고 자문하는 바람에 ‘어, 정말 그런가!’라면서 테너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죠반니 스브릴리야(Giovanni Sbriglia)에게서 테너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장은 세기말을 찬란하게 장식한 프랑스 테너로서 빛나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잘 생긴 얼굴에 귀족다운 우아하고 고귀한 풍모를, 여기에 사나이다운 강렬함도 보여주었다. 그의 특징은 어떤 역할을 맡든지 동정적인 포용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그의 예술적인 진지함, 끊임없이 공부하고 정진하는 노력, 천부적인 연기력은 과연 오페라 스테이지의 백작이었다.

 

엘 시드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874년 우습게도 장 드 레즈케의 이탈리아식 이름인 조반니 디 레스키(Giovanni Di Reschi)라는 이름으로 베니스에서 로시니의 라 화보리타(La Favorita) 중 알폰소 왕을 맡은 것이었다. 물론 당시는 아직 테너로 주민등록을 바꾸지 않은 상태여서 바리톤으로 데뷔하였다. 같은해 런던에서도 역시 조반니라는 이름으로 데뷔하였으며 그후 영국에서 맡은 바리톤 역할은 알마비바백작, 프라 멜리톤(Fra Melitone), 돈 조반니, 발렌틴 등이었다. 바리톤보다 테너가 적격이라는 동생의 권고를 받아들인 그는 2년후인 1876년부터 조반니라는 이름 대신에 장 드 레즈케라는 이름으로 잠시 바리톤 역할을 맡아 하다가 이윽고 테너로 전학하기 위해 5년을 쉬었다. 그 5년동안 그는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테너의 백작이 되었다. 첫 테너 데뷔는 마드리드에서 마이에르베르의 ‘로베르 르 디아블’(Robert le Deable)이었지만 그다지 성공은 아니었다. 테너로서의 대성공은 마스네의 ‘에로디아드’(Hérodiade)에서 장(Jean: 세례요한)을 맡은 것이었다. 이 공연은 파리초연이었다. 이듬해 그는 파리 그랑 오페라(Grand Opéra)에서 마스네의 ‘르 시드’(Le Cid) 세계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역시 찬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그는 그랑 오페라에서 5개 시즌을 보내면서 라다메스(아이다), 바스코 다 가마(아프리카의 여인), 예언자의 타이틀 롤, 파우스트(구노)의 타이틀 롤 등을 맡아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그프리트


이어 몇해동안은 코벤트 가든에서 활동했다. 첫 바그너 역할을 맡은 것도 코벤트 가든에서였다. 로엔그린을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로 교대로 불렀다. 그는 2년동안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치 독일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처럼 독일어에 능숙하게 되었다. 1891년의 미국 첫 데뷔인 시카고에서의 공연도 로엔그린으로였다. 같은 해에 그는 로미오로서 메트로에서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 미국에 있을 때의 레퍼토리는 베르테르, 리카르도(가면무도회), 돈 호세, 지그문트, 어린 지그프리트와 청년 지그프리트(신들의 황혼), 카니오(팔리아치), 트리스탄 등이었다. 장 드 fp즈케는 당대의 유명 오페라 아티스트과 함께 공연한 경우가 많았다. 그의 상대역으로는 아델리나 패티, 디르클레, 릴리안 노르디카, 마르첼라 셈브리히, 릴리 레만, 넬리 멜바, 엘레나 드 시스네로스, 시그리드 아르놀드슨, 엠마 알바니, 엠마 임스, 빅토르 모렐(Victor Maurel), 엘리자베트 슈만-하인크, 프랑시스 사비유(Frances Saville), 로사 올리츠카, 마리오 안코나, 데이빗 비스팸(David Bispham), 밀카 테르니나, 요한나 가드스키....실로 수많은 전설적인 디바들과 함께 공연하였다.

 

로미오


음반 취입은 두어번 했다. 그러나 장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원본을 파괴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린더 타입의 음반이 남아있어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보관되어 있다. 아프리카 여인, 르 시드, 위그노, 로엔그린, 지그프리트, 트리스탄의 아리아들을 취입한 것이었다. 무대에서 은퇴한후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열심을 쏟았다. 그의 제자로서는 마담 샤를르 카이에(Mme Charles Cahier), 리챠드 보넬리, 펠리시에 카쇼브스카, 카르멘 멜리스(Carmen Melis), 아서 앙드레즈(Arthur Endréze), 알버트 린드퀘스트, 매기 타이트, 비두 사야오(Bidu Sayao) 등이 있다. 장 드 레즈케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테너였다. 특히 프랑스 레퍼토리와 바그너, 그리고 이탈리아 레퍼토리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테너였다. 마이클 스콧(Michael Scott)은 장 드 레즈케에 대하여 ‘보컬 스타일은 문화적 특성의 산물이다.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모두 말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라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