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의 영웅 José Carreras (호세 카레라스)
스페인의 택시 기사들은 국왕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호세 카레라스는 잘 알고 있다. 택시 기사들은 호세 카레라스를 거침없이 ‘누메로 우노’(Numero Uno)라고 부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스페인에서 호세 카레라스는 국민적 영웅이다. 그는 노래를 떠나서 ‘인간승리’로서 온 백성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 누구나 아는 대로 그는 한창시절에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입장이었다. 의사들은 생존확률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카레라스는 점점 병세가 심해져서 창백하게 여위어 갔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팬들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불굴의 투병정신으로 죽음의 백혈병을 이겨냈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섭리가 그를 살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존경의 대상이 될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의 따듯한 인간애였다. 카레라스가 빈곤과 불치병과 싸워 승리하기만 했다면 아마 별다른 감동적인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받은 하늘의 은혜를 가난하고 불치병에 고생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보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 그는 ‘호세 카레라스 국제백혈병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을 통하여 그는 백혈병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골수기증자들의 등록을 받고 있다. 카레라스는 새로운 인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키로 결심한 것이다. 카레라스가 플라치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우정을 쌓으며 지내고 있는 것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1946년 12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베르디와 푸치니 오페라의 주인공으로서 세계의 갈채를 받고 있는 금세기 최고의 테너중 한 사람이다. 호세 카레라스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치도 도밍고와 함께 세계적 스리 테너(Three Tenors)로서 더욱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러한 호세 카레라스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고작 8세때에 스페인 전국라디오방송에서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을 부른 것은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지만 위대한 성악가로서의 앞날을 보여준 것이었다. 11살 때에 그는 활라(Falla)의 오페라 El retablo de Maese Pedro에서 소년 역할을 맡았으며 역시 같은 해에 라 보엠 2막에서 거리의 아이들중 한명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의 리체오(Liceo)음악원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리체오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노르마에서 플라비오(Flavio)를 맡아 테너로서 첫 오페라 데뷔를 당당하게 기록하였다. 이 날의 공연에서 타이틀 롤은 정상의 소프라노인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였다. 역시 바르셀로나 출신의 몽세라 카바예는 젊은 호세 카레라스의 음악적 소질을 높이 평가하여 다음해에 도니제티의 루크레지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에 출연토록 주선해 주었다. 카레라스의 첫 성공작이었다. 카레라스는 24세의 나이로 몽세라 카바예와 함께 런던에서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공연하였으며 그로부터 몇 년동안 두 사람은 15편 이상의 오페라에 함께 출연하여 카탈라니의 명예를 드높였다.
베르테르
1972년 호세 카레라스는 핀커튼(나비부인)으로 미국 무대에 데뷔하였다. 미국의 오페라계는 이 새로운 핀커튼에 매료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74년은 카레라스에게 있어서 뜻깊은 해였다. 그해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만토바공작(리골레토),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 뉴욕 메트로에서 카바라도씨(토스카)를 맡아 세계 최고의 오페라 무대들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975년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리카르도(가면무도회)를 맡은 것은 카레라스를 일약 세계적 대스타로서 확인해 준 것이었다. 카레라스는 이미 28세 때에 24개의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아 할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1987년, 한창 정상의 궤도를 달리고 있을 때인 41세 때에 그는 뜻하지 않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앞서 설명한대로 생명을 유지할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털어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회복되기에는 시간과 돈이 더 필요했다. 그때 그는 에르모사(HERMOSA)라는 재단을 알게 되었다. 백혈병 환자들의 치료를 지원해 주는 재단이라는 것이었다. 카레라스는 갸날픈 희망을 가지고 도움을 청했다. 에르모사재단은 기꺼이 카레라스를 돕겠다고 나섰다. 이로서 카레라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재단의 지원을 받아 투병생활을 계속하여 살아났고 다시 노래를 부를수 있게 되었다. 에르모사 재단은 카레라스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후 카레라스(카레라이스와 혼돈하지 말기를)는 이 재단이 플라치도 도밍고가 자기의 딱한 사정을 돕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재단임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카레라스는 도밍고와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그러한 관계의 도밍고가 자기를 몰래 도와주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동한 카레라스는 어느날 도밍고가 어떤 연주에서 노래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 순간에 무대에 올라와 도밍고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도밍고는 카레라스를 일으켜 세우고 힘차게 포옹하였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은 아름답게 계속되었다. 1990년 세계의 수백만 사람들은 로마 월드컵 오프닝에서 3인의 테너(Three Tenors)의 콘서트를 보았다. 이 콘서트는 원래 카레라스가 2년전인 1988년에 세운 ‘호세 카레라스 국제백혈병재단’의 기금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밍고와 파바로티가 동료인 카레라스의 무대 컴백을 환영하기 위해 주선된 것이었다. 이 콘서트의 실황을 CD로 제작한 것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카레라스는 오페라 이외에도 스페인 전통의 오페레타인 차르추엘라, 그리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뮤지컬에도 출연하였다.
돈 카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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