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코르시카의 자부심 José Luccioni (호세 루치오니)

정준극 2008. 3. 2. 17:02
 

▒ 코르시카의 자부심 José Luccioni (호세 루치오니) 

 


1903년 코르시카 출신인 호세 루치오니는 아직도 청년 시절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 군에 입대하였으며 군에 복무할때에 주위로부터 성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제대하자마자 정식 음악 교육을 받아 성공한 경우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성악가의 길을 걷기도 다짐한 것은 세자로 베짜니 때문이었다. 아직 병사로 있던 어느날, 그는 이탈리아 순회연주단의 코르시카 공연에서 테너 세자르 베짜니(Cesar Vezzani)의 노래를 듣고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더구나 주위 동료들이 ‘노래 잘하니까 테너가 되라!’고 자꾸 부추기는 통에 기왕에 테너가 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실현키로 결심했다. 나폴레옹처럼 코르시카를 떠나 파리로 간 그는 1927년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소프라노 유제느 시즈(Eugéne Size)등 훌륭한 선생님들 아래에서 공부를 했다. 그건 그렇고 유제느 시즈는 나중에 루치오니의 부인이 되었다.


그는 1931년 파리 그랑 오페라에서 팔리아치의 카니오를 맡아 데뷔하였으나 처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2년후 파리 오페라코미크에서 돈 호세를 맡은 것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돈 호세만을 5백회 이상 맡아하였다. 그래서 길거리에서든 어디서든지 그가 나타나면 그의 원래 이름 대신에 돈 호세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리릭 보다는 드라마틱 역할에 더욱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음에서 특별히 뛰어난 드라마틱 테너였다. 그러한 그를 사람들은 ‘알 프레스코’(Al fresco) 테너라고 불렀다. 야외에 적합한 테너라는 의미이다. 그는 벨기에, 스페인에서 대대적인 인기를 차지하였고 미국에서는 1938-39년 시즌에 시카고에 리릭오페라에 출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그의 대표인 역할은 돈 호세이다. 그러나 삼손과 오텔로에도 뛰어났었다. 그러나 그는 리릭 파트인 베르테르, 데 그류, 나디르(진주잡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그는 몇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재능도 보여주었다. 그는 1978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