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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오페라의 수퍼 테너 Joseph Schmidt (요제프 슈미트)

정준극 2008. 3. 2. 17:05
 

▒ 라디오 오페라의 수퍼 테너 Joseph Schmidt (요제프 슈미트)

 


루마니아의 테너 요제프 슈미트는 음악적으로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비록 최후가 비참하기는 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모든 성공과 영광을 차지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1904년 다비덴데(Davidende)라는 마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때 1차대전이 터지자 식구들을 따라 체르노비츠(Czernowitz)라는 마을로 옮겨갔고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그곳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중등학교에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슈미트의 식구들은 집에서는 루마니아어를 썼고 학교에서는 독일어를 썼으며 유태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배웠다. 소년시절, 슈미트는 순전히 취미활동의 하나로 유태교 회당의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러다. 몇년후 슈미트의 소리는 놀랍도록 부드럽고 아름다운 리릭 테너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슈미트는 체르노비츠의 여러 합창단에서 솔리스트로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24년, 그는 20세때에 스스로 독창회를 개최하였다. 루마니아 민요, 유태의 민속 노래, 그리고 푸치니, 베르디, 비제, 로시니,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아리아를 불렀다. 그날 밤은 대성공이었다. 20세의 청년 슈미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성악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베를린음악원에 들어갔고 이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후 군대에 징병되어 나가게 되어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악대에 배속되어 엉뚱하게도 큰북을 쳤다. 그러나 목소리가 좋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장교들 모임에서 자주 노래를 불렀다. 제대하고 나서 그는 고향인 체르노비츠 유태교 회당의 솔리스트로 활동 하다가 27세 때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전문 성악가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슈미트는 키가 작다는 핸디캡 때문에 오페라 출연이 어려웠다. 그의 키는 미안하지만 1미터 50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무대에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오페라에서 상대역인 소프라노들의 키가 대체로 크기 때문에 대단히 곤란하였다. 슈미트는 오페라 테너로서 명성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대가 그의 편이었던 것 같았다. 1920년대에는 이미 무선 라디오가 등장하여 많이 보급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라디오를 듣는 일이 대단한 오락생활이었다. 라디오 방송국들은 뛰어난 성악가를 찾아 방송에 출연시키는 것이 큰 일이었다. 베를린 라디오방송국이 슈미트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방송국장이 슈미트의 노래를 듣고 그의 음성을 사랑하여 방송국에 출연토록 한 것이다. 슈미트는 라디오 오페라 시간에 무려 37개 역할을 맡아 청취자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가 주역으로 출연한 라디오 오페라는 아담(Le Postillon de Lonjumeau), 오버(La Muette de Portici), 베를리오즈(벤베누토 첼리니), 샤펜티어(루이제), 마이에르베르(디노라, 예언자), 모차르트(이도메네오, 마적), 오펜바흐(호프만의 이야기), 로시니(세빌리아의 이발사, 윌리엄 텔, 세미라미데), 그리고 베르디(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가면무도회, 돈 카를로, 시실리의 만종) 등이었다. 슈미트는 라디오 오페라의 선구자였다.


TV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당시에 오페라에 출연하기 어려운(슈미트의 경우는 키가 작아서) 상황에서는 콘서트를 가지거나 또는 영화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길이 유일했다. 슈미트는 두 경우에 모두 등장하였다. 특히 영화 덕분에 그는 마음껏 노래를 부를수 있었고 오페라 무대에서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을수 있었다. 더구나 사람들은 라디오에서의 인기 테너를 직접 보고 싶어했다. 영화에서는 작은 키를 적당히 가려줄수 있어서 슈미트는 대단한 멋쟁이 남자 배우로 당당하게 스크린에 등장할수 있었다. 슈미트는 처음에 ‘사랑의 급행열차’(Liebesexpress)라는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를 주역으로 삼는 영화를 별도로 만들 정도로 배우로서 그의 재능은 대단한 인정을 받았다. 첫 번째 영화는 1933년에 만든 ‘세상을 향한 노래’(Ein Lied geht um die Welt)였다. 이 영화의 시사회에는 히틀러와 그의 나치 간부들까지 참석했다. 이 영화는 유태인이 감독하였고 유태인인 슈미트가 주역을 맡은 것이지만 당시까지는 유태인에 대한 핍박이 없어서 독일 전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슈미트는 다른 영화에도 출연하였고 그에 대한 인기는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나치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슈미트의 시대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슈미트는 미국으로 가서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었지만 생전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릴리안스 디에트와 함께


1939년 그는 독일을 떠나 벨기에에 정착하였다. 나치는 유태인인 그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브뤼셀은 그를 따듯하게 환영하였다. 브뤼셀에서 그는 라보엠의 로돌포를 맡아 오페라 무대에 섰다. 그의 최초이자 마지막 오페라 무대였다. 그러나 벨기에도 그에게는 안전하지 못했다. 1940년 나치가 벨기에를 점령하자 유태인인 슈미트는 추방을 당했다. 그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약속된 밤중에 항구로 가서 보니 이미 다른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을 대고 몰래 대신 미국행 배를 타고 떠났다. 나치를 피할 길은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를 통하여 러시아로 가는 방법이 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바다였지만 벨기에의 모든 항구를 나치가 봉쇄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도피할 길이 전혀 없었다. 할수 없이 프랑스로 도피했지만 역시 임시방편이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랑스도 그에게는 안전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스위스를 택하였지만 스위스도 그의 합법적인 망명 요청을 거절했다. 그래도 스위스만이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한 그는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밀입국하였다. 험난한 알프스를 넘어 천신만고 끝에 취리히에 도착하였지만 결국 1주일도 못되어 당국에 검거되었다. 슈미트는 취리히 부근의 기렌바드-힌빌(Girenbad-Hinwil)수용소에 다른 유태인 350명과 함께 수감되어 기대하기도 어려운 망명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수용소의 생활 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슈미트는 힘든 강제 노동 때문에 얼마전부터 도지기 시작했던 심장병이 무리가 생겨 무척 쇠약해졌고 마침내 심장마비를 일으켜 쓸어졌다. 그러나 수용소 당국은 그가 노동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심장병에 걸린 것처럼 행동한다고 믿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급기야 두번째 심장마비를 일으켜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미 때는 늦어 며칠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단지 38세때였다. 그는 취리히의 유태인 묘역에 매장되었다. 묘비에는 ‘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적혀있다. 그가 출연했던 유명한 영화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Ein Stern fällt vom Himmel)를 기억코자 하는 문구이다. 그가 몇장의 음반을 남긴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