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너의 왕중 왕 Jussi Bjorling (유씨 비욜링)
세계를 정복한 최고 테너중의 한 사람인 유씨 비욜링은 1911년 2월 스웨덴 달라르나(Dalarna)지방의 보르랭게(Borläng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 마을은 스토라 투나(Stora Tuna)라는 이름이었으나 나중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의 보르랭게로 불리게 되었다. 보르랭게라는 작은 마을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이곳에 유씨 비욜링의 기념박물관이 있어서 유씨 비욜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상당수 찾아오기 때문이다. 비욜링의 아버지 다비드(David)는 마을의 테너 솔리스트 겸 음악선생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3형제, 즉 올레, 유씨, 괴스타에게 어릴때부터 성악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아들 중에서도 유씨의 노래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고 다섯 살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이어 아버지는 어린 아들 3형제와 함께 ‘비욜링 4중창단’을 만들어 스웨덴 전국을 순회 공연했다. ‘비욜링 4중창단’이 스웨덴에서 인기를 얻자 아버지는 용기를 얻어 아들들을 데리고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비욜링이 겨우 8세때였다. 비욜링의 어머니 에스터(Ester)는 비욜링이 여섯 살 때에 불행하게도 네 번째 아들을 낳은후 세상을 떠났다. ‘비욜링 4중창단’은 미국에서 3년동안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로부터 5년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은 넷째 동생 카를을 끌어넣어 ‘비욜링 4중창단’을 계속했지만 아무래도 아이들만으로는 모든 것이 어려워 궁리 끝에 4중창단을 해산하게 되었다. 유씨는 2년후인 1928년 스톡홀름 음악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로열 오페라의 감독인 존 포르셀(John Forsell)의 각별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비욜링은 19세 때에 스톡홀름의 로열오페라(지금의 Operan)에서 돈 조반니의 돈 오타비오(Don Ottavio)로 맡아 공식적인 데뷔를 하였다. 그가 Il mio tesoro를 마치자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였다. 그의 맑고 순수하며 감미롭고 서정적인 노래에 완전히 매료당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동안 스톡홀름 로열오페라의 주역 테너로서 활약했던 유씨는 코펜하겐의 티볼리(Tivoli)극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럽의 여러 오페라 무대에서 박수를 받기 시작했다. 유씨는 비엔나에서 가장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비엔나는 유씨의 돈 오타비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후 그는 주로 비엔나에 머물면서 경력을 쌓아갔다. 1937년 가을, 그는 GM사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여 카네기 홀에서 라디오로 중계하는 연주회를 가졌고 이어 시카고에서 리골레토와 라 보엠에 출연하여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메트로 데뷔는 1938년 라 보엠의 로돌포였다. 그의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과 맑게 호소하는 듯한 음성은 사람들을 열광케 하고도 남았다. 1940년 유씨는 메트로의 새로운 제작인 ‘가면무도회’에 스웨덴의 구스타프3세 왕을 맡았다. 스웨덴 사람인 유씨로서는 감격적인 공연이었다. 그로부터 유씨는 최고의 ‘구스타프 3세’라는 평을 받았다. 메트로에서 몇 년을 지낸 그는 조국 스웨덴으로 돌아와 스웨덴 국민들을 위한 오페라 공연에 힘을 쏟았다. 그는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시 미국의 초청을 받아 메트로와 시카고, 샌 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그로부터 주로 미국에 머물며 유명 라디오,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콘서트를 가지며 지냈다. 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사랑하는 아내 안나 리사(Anna Lisa)와 세 자녀를 데리고 스웨덴의 시아뢰(Siarø)에 있는 별장에서 지냈다. 그는 스웨덴과 핀란드, 노르웨이등 북구의 나라에서도 자주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마농'에서 데 그류
비욜링의 오페라 레퍼토리는 55편에 이르지만 대표적인 역할은 10여개로 한정된다. 특히 알마비바 백작(세빌리아의 이발사), 아놀드(윌리엄 텔)와 같은 역할은 한두번만 맡아 하였을뿐 다시 맡지는 않았다. 그의 대표적인 역할들은 그가 젊은 시절 스톡홀름 음악원에서 공부했던 것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라다메스(아이다), 구스타프왕(가면무도회), 카를로(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로돌포(라 보엠), 카바라도씨(토스카), 카니오(팔리아치), 투리두(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이며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파우스트, 로미오(로미오와 줄리엣) 등이다. 나중에 그는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와 베르디의 돈 카를로(Don Carlo)를 추가하였다. 돈 카를로는 1950년 메트로 공연으로서 유명한 음악감독 루돌프 빙의 시대를 여는 공연이었다.
돈 카를로
비욜링은 말년에 심장질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결국 1960년 9월 9일 세계를 압도하였던 미성의 테너 비욜링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스웨덴의 시아뢰 별장에서 잠든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가장 위대한 테너를 잃었다. 실제로 그는 많은 나라에서 여론조사 결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테너로 선정되었다. 다행하게도 비욜링은 수많은 레코드를 남겼다. 그 중에는 그가 1920년 '비욜링 4중창단‘의 일원으로 미국 순회 공연중 녹음한 것도 아직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인 1960년 6월, 베르디의 진혼곡이었다. 아마도 죽음을 미리 예견했던 것 같다. 비욜링이 태어난 보르렝게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Nessun dorma(투란도트에서 칼라프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그는 세계적 테너이기 이전에 겸손하고 평범하며 약간은 수줍어하는, 그러나 대단히 가정적이며 교양 있고 멋있는 신사였다.
비요링 가족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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