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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고의 바그너 테너 Lauritz Melchior (로리츠 멜키오르)

정준극 2008. 3. 2. 17:10
 

▒ 사상 최고의 바그너 테너 Lauritz Melchior (로리츠 멜키오르)


로리츠 레브레헤트 홈멜 멜키오르(1890-1973)는 덴마크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활동한 20세기초 가장 위대한 바그너 테너였다. 그의 음악에 대한 첫 경력은 코펜하겐의 영국성공회 성가대에서 보이 소프라노(Boy Soprano)로서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이어 덴마크 왕립오페라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913년 로열덴마크오페라극장에서 팔리아치의 실비오(Silvio)를 맡아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그는 처음에 바리톤으로 시작하였으나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에서 레오노라와 루나 백작의 듀엣을 부를때 하이C를 낼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상대역 소프라노는 극장측에 강력히 얘기하여 멜키오르가 1년간의 유급휴가를 받아 테너를 다시 공부하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7-18년 시즌에 하이 바리톤으로부터 테너로 변신하여 코펜하겐에서 탄호이저의 타이틀 롤을 맡을수 있었다.

 


멜키오르는 영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고 이때 무선전신을 발명한 마르코니의 초청을 받아 최초의 국제간 라디오 중계에 참석하였다. 방송은 그에게 많은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가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지그프리트, 바이로이트에서 맡은 파르지팔은 전파를 타고 세계로 알려졌다. 이윽고 메트로가 그를 초청하였다. 1937년 그는 메트로에서 탄호이저의 타이틀 롤을 맡아 갈채를 받았다. 2차 대전중 덴마크가 나치에 점령되자 고국에 돌아갈수 없었던 그는 미국에 남아 오페라에 출연하였고 이 기간동안 여러 음반을 취입하였다. 멜키오르는 1950년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렇지만 라디오와 TV에는 계속 출연하였다. 70세 생일을 맞이하여서는 지그문트로서 콘서트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지휘에도 재능을 보여주었다. 지휘자로서의 마지막 활동은 1966년 ‘박쥐’였다. 은퇴후 그는 바그너 테너(Heldentenor)를 발굴하여 육성하는 재단을 만들었다. 세기를 풍미하였던 바그너 테너 멜키오르는 73세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엔그린


✤ 멜키오르와 바그너 역할

탄호이저: 멜키오르가 헬덴테너(영웅테너)로서 처음 데뷔한 역할이었다. 1918년 코펜하겐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였다. 메트로에서는 1926년 처음으로 탄호이저를 맡았다. 당시 출연진은 엘리자베트에 마리나 예리차, 비너스에 카린 브란젤(Karin Branzell), 볼프람에 프리드리히 쇼르(Friedrich Schorr)였다. 바이로이트에서는 1930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탄호이저의 새로운 제작에 출연하였다. 무대감독은 지그프리트 바그너였다. 멜키오르는 생전에 144회의 탄호이저 역할을 맡아하였다.


로엔그린: 1927년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처음으로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을 맡아하였다. 그후 1950년 무대에서 은퇴할때까지 106회의 로엔그린을 맡아하였다. 1950년 메트로 무대에서 로엔그린이 엘자와 이별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멜키오르도 오페라 무대와 영원한 작별을 고하였다.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로엔그린의 신부 엘자 역할은 로테 레만, 엘리자베트 레트버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헬렌 트라우벨(Helen Traubel), 아스트리드 바르나이(Astrid Varnay), 에미 베텐도르프(Emmy Bettendorf) 등이었다. 한편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텔라문트 역할은 프리드리히 쇼르, 알렉산더 스베드(Alexander Sved), 허버트 얀쎈(Herbert Janssen)등이었다. 멜기오르는 바이로이트에서 로엔그린을 공연하지 않았다. 바이로이트에서는 1936년까지 로엔그린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었다. 바이로이트에서 로엔그린을 다시 무대에 올렸을 때 백조의 기사를 맡은 사람은 프란츠 뵐커(Franz Völker), 막스 로렌즈(Max Lorenz), 미르셀 비트리슈(Marcel Wittrisch) 등이었다.


파르지팔: 멜키오르가 처음으로 바그너 역할은 맡은 것이 파르지팔이었다. 1924년 바이로이트가 1차대전 이후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첫 공연으로 선정된 작품이 파르지팔이었으며 이때 멜키오르가 타이틀 롤을 맡았었다. 그러나 멜키오르는 별다른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어떤 평론가는 신문에 ‘로리츠 멜키오르라는 이름의 테너가 타이틀 롤을 맡아 데뷔하였다. 그 이름을 다시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의 음성을 무대에서 다시 들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라면서 비평을 보냈다. 멜키오르의 계속되는 훌륭한 공연으로 이같은 예상은 전혀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멜키오르는 생전에 80회의 파르지팔을 맡아하였다.


지그문트(발퀴레): 1924년 코벤트 가든에서 처음으로 지그문트를 맡아 찬사를 받았다. 당시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지휘하였으며 상대역인 지그린데는 에미 크뤼거(Emmy Krüger), 보탄은 칼 브라운(Karl Braun)이었다. 불과 몇 달전에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맡아 호평을 받지 못한 것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는 성공이었다. 멜키오르는 1931년까지 바이로이트에서 지그문트를 맡아 격찬을 받았다. 그는 통산 181회의 지그문트를 맡았다.


지그프리트(지그프리트): 1925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처음으로 지그프리트를 맡았었다. 당시 상대역인 브륀힐데는 프리다 라이더(Frida Leider)였다. 메트로에서의 첫 지그프리트는 1926년이었으며 에르다는 에르네스티네 슈만-하인크였다. 멜키오르는 생전에 지그프리트를 121회 맡았다.


지그프리트(신들의 황혼): 멜키오르는 1927-30년에 바이로이트를 필두로 베를린, 런던, 메트로에서 지그프리트를 맡아했다. 브륀힐데는 프리다 라이더, 크리스틴 플라그스타드, 마조리 로렌스, 헬렌 트라우벨 등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지그프리트만 107회 공연하였다.


트리스탄: 멜키오르가 가장 많이 맡아했던 역할이다. 통상 223회를 맡아했다. 이같은 기록은 아직 아무도 깨트리지 못한 것이다. 환상의 이졸데 역할은 프리다 라이더,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헬렌 트라우벨 등이었다. 1928년 바이로이트에서의 트리스탄 재제작은 토스카니니 지휘였다.


세계적 영웅 테너

멜키오르가 당대 최고의 바그너 영웅테너라는 것은 그에게 경쟁자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반면 다른 테너들은 멜키오르처럼 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 어떤 테너는 멜키오르보다 뛰어났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바그너의 헬덴테너에 있어서는 멜키오르와 비교할수는 없었다. 멜키오르와 경쟁적 입장에 있었던 당대 테너들의 이름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영웅테너가 집중적으로 탄생한 시기였다.


폴란드 출신으로 카루소가 등장하기 전까지 테너의 제왕이었던 장 드 레즈케(Jean de Reszke: 1850-1925), 독일 출신으로 최초의 바그너 영웅테너라고 할수 있는 자크 울루스(Jacques Urlus: 1867-1935), 독일 출신으로 뛰어난 영웅테너였던 하인리히 크노테(Heinrich Knote: 1870-1953), 영국 최고의 바그너 테너인 월터 위도프(Walter Widdop: 1892-1949), 바그너테너의 성공신화를 창조한 독일의 루돌프 라우벤탈(Rudolf Laubenthal: 1886-1973), 독일 최고의 리릭 바그너 테너인 프란츠 �커(Franz Völker: 1899-1965), 가장 뛰어난 독일적 영웅테너인 막스 로렌츠(Max Lorenz: 1901-1973), 스웨덴 출신으로 가장 중요한 바그너 테너라고 알려진 세트 스반홀름(Set Svanholm: 1904-1064), 독일 출신의 가장 탁월한 바그너 테너인 루드비히 주트하우스(Ludwig Suthaus: 1906-1971), 남미 칠레 출신으로 가장 뛰어난 트리스탄인 라몬 비나니(Ramon Vinay; 1912-), 독일의 위대한 바그너 테너인 볼프강 빈트가쎈(Wolfgang Windgassen: 1914-1974), 독일출신으로 1950년대 가장 중요한 바그너 테너였던 한스 호프(Hans Hopf: 1916-1993),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 영웅테너인 욘 비터스(Jon Vickers: 1926-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