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경을 딛고 역사를 창조 Leo Slezak (레오 슬레자크)
모라비아의 숨페르크(Sumperk)에서 1873년 태어난 레오 슬레자크는 빈곤을 이기고 성공한 위대한 테너였다. 그는 가난한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운영하던 방앗간이 빚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자 알거지가 된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브르노(Brno)로 와서 막노동이나 거리에 좌판을 놓고 행상을 하면서 지나게 되었다. 그후 몇 년이 흘렇고 아버지의 성실함으로 슬레자크의 집안은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학교를 겨우 마친 슬레자크는 처음에 정원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열쇠장이가 되었다. 그러나 천부적인 음성을 가졌던 그는 일하면서도 틈틈이 노래공부를 하였고 브르노 극장에서 아마추어이지만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리톤인 아돌프 로빈슨(Adolf Robinson)이 슬레자크를 보고 기특히 여겨 만일 자기 밑에서 죽어라고 공부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장래를 보장하겠다고 제의했다. 마침 슬레자크는 비엔나왕실오페라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그는 이것도 거절하고 로빈슨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발성과 표현에 전념하여 마침내 스승도 놀라는 훌륭한 테너로 다시 태어났다.
1986년 그는 브르노에서 로엔그린으로 데뷔하였다. 놀라운 성공이었다. 이로서 그는 브로노의 스타가 되어 수많은 역할을 맡는 주요 테너가 되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베를린까지 퍼져나갔다. 그는 베를린오페라에 5년간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준 역할은 조역에 불과하였다. 그는 주역을 맡기 위해 계속 무던히 공부하며 노력을 쌓았다. 결국 베를린오페라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주역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는 예언자에서 장(Jean)을 비롯하여 탄호이저, 만리코, 아돌라, 오이리안테, 카니오, 로엔그린, 플로레스탄, 슈톨칭, 투리두, 에리크, 라다메스, 데 그류, 타미노, 그리고 지그프리트 등 대역을 맡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그는 런던까지 진출하여 로엔그린, 탄호이저, 지그프리트 등 주역을 맡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름다운 여배우 엘리자베트 베르트하임(Elisabeth Wertheim)을 만나 결혼하였다. 이듬해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 딸 마가레트 슬레자크(Margarete Slezak)는 나중에 유명한 소프라노가 되었다. 그 해에 슬레자크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 객원출연하였다. 대단한 찬사를 받은 공연이었다. 그로부터 슬레자크는 비엔나 슈타츠오페와 오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비엔나에서 그는 구스타프 말러가 인솔하는 최고성악가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1902년 아들 발터가 태어났다. 발터는 나중에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었다. 1907년, 구스타프 말러가 비엔나 슈타츠오퍼를 떠나자 슬레자크도 비엔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파리에 가서 더욱 공부에 전념하였다. 몇 년후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확실히 전보다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에 메트로가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메트로의 초청에 응하였지만 그렇다고 비엔나 슈타츠오퍼를 떠나지는 않았다. 메트로에서 그는 오텔로, 라다메스, 스트라델라, 로엔그린, 활우스트,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허만(Hermann), 슈톨칭, 탄호이저, 만리코, 타미노 (에미 데스틴의 상대역) 등 수많은 역할을 맡아하여 절대적인 인기를 차지하였다. 미국에서 그가 지낸 기간은 그의 황금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떠나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는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는 엘레아지(유태여인), 라다메스, 파우스트, 로엔그린, ‘시바의 여왕’의 아싸드(Assad), 장(예언자), 라울(위그노)로서 비엔나 시민들에게 보답하였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와 슬레자크의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슈타츠오퍼는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셀라자크에 대한 높은 급여를 지급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쩔수 없이 슈타츠오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그는 오스트리아의 대도시들은 물론, 미국, 독일, 네덜란드에서 오페라 출연과 콘서트 연주를 가졌다. 가는 곳마다 뜨거운 찬사가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거의 10년후인 1917년 그는 결국 비엔나 슈타츠오퍼와 다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은퇴할때까지 슈타츠오퍼의 가족으로서 생활하였다. 불행하게도 1차대전의 막바지에 그는 그동안 모았던 모든 재산을 잃었다. 어떤 연유로 재산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하루아침에 가난한 테너가 되었다. 할수 없이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캬바레같은 곳에서 노래를 불렀고 어쩌다가 오페레타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비록 경력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슬레자크는 슬레자크였다. 나이가 들고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오텔로와 탄호이저를 부를수 있었다. 1934년, 팔리아치에 출연한 후, 그는 은퇴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배우로서 변신하였다. 그는 43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생활도 어느정도 윤택하게 되었다. 1943년 그는 부인과 함께 독일의 로타흐-에게른(Rottach-Egern)으로 집을 옮겼다. 사랑하는 아내는 이듬해인 1944년, 한창 전쟁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세권의 자서전적 책을 썼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다른 한 권의 책을 쓰려고 했으나 결국 194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미완성의 책은 딸 마가레트가 ‘나의 인생이야기’(Mein Lebensmärchen)이란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마술피리'에서 타미노 왕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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