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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모차르트 테너 Leopold Simoneau (레오폴드 시모노)

정준극 2008. 3. 2. 17:13
 

▒ 당대의 모차르트 테너 Leopold Simoneau (레오폴드 시모노)

 


레오폴드 시모노의 음성에 대하여 오페라국제사전은 ‘당대의 모차르트 테너’라고 표현했다. 1956년 모차르트 탄생 2백주년을 맞이하여 시모노는 토마스 비�, 존 프리챠드, 허버트 폰 카라얀, 브루노 월터 등 세계적 유명 지휘자들과 함께 몇장의 기념 음반을 취입하였다. 브루노 월터는 시모노에 대하여 ‘그는 최고 정상의 음악인이다. 은빛과 같은 음색과 한점의 티도 없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부터의 표현을 한다. 모차르트 역할로는 최적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평론가는 ‘존 매코맥 이후 가장 미성의 테너’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그가 모차르트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시모나는 비발디로부터 베르디, 글룩으로부터 스트라빈스키, 모차르트부터 오펜바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졌다. 그는 몬트리올 태생의 부인인 소프라노 피에레트 알라리(Pierrette Alarie)와 함께 오페라에 출연하거나 콘서트를 갖거나 또는 음반을 취입한 일이 많았다. 특히  두 사람은 자주 공연했던 커플 역할은 ‘로미오와 줄리엣’ ‘뱅생과 미레이유’(Vincent et Mireille), ‘토니오와 마리’ ‘알마비바와 로지나’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그리고 가장 여러번 함께 출연한 역할은 ‘벨몬테와 블론드헨’(후궁에서의 도피)이었다.


1918년 캐나다의 퀘벡 부근 생-플라비앙(St Flavien)에서 태어난 시모나는 지방대학을 거쳐 몬트리올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부인인 알라리를 만난 것은 바로 몬트리올에서였다. 두 사람은 결혼전에도 지방 오페라 무대에서 여러번 함께 공연했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커플이 된것은 토마스 비�경이 지휘한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와 로지나를 맡은 것이었다. 그러던중 알라리가 1944년 메트로의 오디션에 당당히 우승하여 뉴욕으로 가게 되었고 마침 시모나도 알샹보 상(Prix Archambault)을 받아 뉴욕에서 공부할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46년 결혼하였다. 몇 년후 시모나는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 데뷔하였고 이어 액-생-프로방스와 글린드본 페스티발에서 모차르트를 불러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역사적인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렉스(Oedipus Rex)에 출연하여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 공연은 작곡자 자신이 지휘봉을 맡았으며 장 콕토(Jean Cocteau)가 내레이션을 맡은 뜻깊은 것이었다. 이어 그는 이듬해에 라 스칼라에서 돈 조반니로서 찬사를 받았다. 이 역할은 1956년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 탄생 2백주년 기념공연에서도 맡은 것이었다. 몬트리올 스타지의 평론가 맥리안(McLean)은 시모나의 돈 조반니에 대하여 ‘그보다 더 나은 돈 오타비오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썼다. 메트로에서 돈 오타비오를 맡았을 때 뉴욕타임스지의 테오도르 스트롱긴(Theodore Strongin)은 ‘지성과 미성을 겸비한 테너’라고 찬사를 보냈다. 2년후인 1964년, 그는 185번째 돈 오타비오를 맡은후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후에도 콘서트에 출연하는등 계속 활동하였으며 마지막 콘서트는 1970년, 54세때에 몬트리올에서 헨델의 메시아였다. 1972년 시모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시모나는 성악교수로 활동했으며 부인 알라리는 캘리포니아 해변에 따라 위치한 작은 도시들의 오페라 무대감독으로 활동했다. 몇 년후 이들은 캐나다의 브리티쉬 컬럼비아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캐나다 오페라 피콜라(Canada Opera Piccola)라는 오페라 마스터 클래스를 설립하여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이 클래스는 높은 명성을 얻어 수많은 젊은 음악도들이 오페라를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가 재정지원을 할수 없게 되자 1988년 문을 닫았다. 시모노 부부는 현재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 피에레트 알라리는 1921년 몬트리올합창단 지휘자 겸 첼리스트인 실바 알라리의 딸로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성악을 전공한 여배우로서 당시 인기 TV 연속극이었던 Plouffe Family에서 어머니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었던 사람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피에레트는 아주 어릴때부터 라디오방송에 출연했으며 14살 때부터는 바리에테 리리크(Variétés Lyriques)라는 몬트리올 오페레타단의 공연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재능을 보였다. 피에레트의 인기는 계속 높아졌으며 남편 레오폴드 시모노를 만났을 때는 이미 퀘벡주의 유명 인사였다. 1943년, 피에레트는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의 장학금을 받아 엘리자베트 슈만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2년후에는 메트로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에레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45년 12월, 메트로에서 오스카(가면무도회)로였다. 그는 3년동안 메트로에 있으면서 올림피아(호프만의 이야기)등을 맡았으며 릴리 폰스(Lily Pons)의 대역을 맡아 무대에 등장한 경우도 있었다. 1949년 파리로 옮긴 그는 들리브의 라크메(Lakme)에 타이틀 롤로 데뷔하여 찬사를 받았으며 그후 5년동안 파리에 있으면서 루치아, 로지나, 올림피아 등을 맡아 명성을 떨쳤다. 그는 플랑크의 ‘인간의 음성’, 오펜바흐의 ‘파리 여인의 생활’(La Vie Parisenne)의 북미 초연에서 주역을 맡았다. 피에레트는 남편 시모노를 따라 1970년 무대에서 은퇴하여 캘리포니아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 이후의 생활은 시모노 편에서 설명한대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