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의 축복 Miguel Fleta (미구엘 플레타)
스페인은 이탈리아나 독일, 프랑스처럼 거장 작곡가들의 배출에는 빈곤하지만 세계를 풍미하는 뛰어난 성악가들을 수없이 배출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이 스페인에게 내려준 축복이 아닐수없다. 그 중에서도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미구엘 플레타는 전설을 창조한 위대한 테너였다. 그의 찬란한 무대 경력은 1919년 트리에스테에서 데뷔한 이래 1935년 은퇴할 때까지 다만 16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전설적인 활동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되새겨져서 이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중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4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대에서 은퇴하고 나서 3년후였다.
리골레토에서 공작
미구엘 플레타는 1897년 스페인의 알발라테 데 친카(Albalate de Cinca)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부터 낮에는 농산물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지만 저녁에는 집에서 솔페지오(음표를 계명으로 부르는 시창)를 공부하며 테너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20세때에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자라고자(Zaragoza)라는 도시에서였다. 식구들의 적극적인 응원을 받은 그는 ‘에라, 테너로서 성공하지 못하면 차라리 농사꾼이 되자!’라는 심정으로 자라고자시의 음악경연대회에 출전했으나 미안하게도 등수에는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심사위원들은 플레타의 음성이 1등의 음성보다 뛰어나게 훌륭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내친김에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로 가서 성악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얼마후 그는 리체우(Liceu)음악원 입학을 위한 오디션을 보았으나 남자는 이미 정원이 찼기 때문에 자리가 없으므로 오디션 볼 필요도 없다고 하는 바람에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플레타가 오디션에서 부를 노래를 들은 유명한 음악교사 루이자 피에리크(Luisa Pierrick 또는 Perrick)는 플레타가 위대한 테너가 될수 있음을 예견하고 자기가 직접 레슨하겠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음악원장의 승낙을 받아 입학토록 해주었다. 루이자 피에리크는 상당히 이름을 알려진 소프라노이기도 했다. 남학생 클라스는 이미 정원이 되었기 때문에 피에리크는 플레타를 여학생들만의 자기 클라스에 들어오도록 하여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플레타가 음악원장 앞에서 노래를 부를때 멀리 복도 끝에 있는 피에리크의 클라스까지 그 당당하고도 장엄한 테너 아리아가 들려오자 교실에 있던 모든 여학생들이 ‘도대체 이렇게 훌륭하게 노래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궁금증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복도로 뛰어나와 원장실로 몰려갔었다고 한다.
피에리크는 아르페지오를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플레타의 문화적 교양을 높이는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 플레타가 미술과 연극을 이해토록 했고 문학작품을 읽도록 했다. 아울러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토록 했다. 그는 또한 앞으로의 전문적 무대 진출에 대비하여 10여편의 오페라 스코어를 완전히 마스터하는 공부를 하였다. 2년동안의 리체우음악원에서의 코스를 마친 플레타는 1919년 피에리크 선생님의 적극적인 주선에 따라 밀라노에 진출하였으나 라 스칼라에서는 기회가 닿지 않아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말, 트리에스테오페라극장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트리에스테에서는 찬도나이(Zandonai)가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찬도나이는 플레타의 노래를 들어본후 그 자리에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에 주역을 발탁하였다. 플레타가 22세때였다. 그건 그렇고 플레타는 나중에 성악선생님이었던 매력적인 소프라노 루이자 피에리크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피에리크는 남편을 떠나 플레타와 결혼하였다. 선생님이 하루 아침에 여보로 변한 것이다. 트리에스테에서의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데뷔는 별다른 호평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냉담한 반응만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같은 극장에서의 라다메스(아이다)는 대단한 성공이었고 평론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것이었다. 아이다에서의 성공으로 그의 이름은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비엔나, 프라하, 바르샤바 등지에서 토스카, 메피스토펠레, 팔리아치, 카르멘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그는 비엔나로 돌아오기 전에 바르샤바에서 푸치니를 만났고 푸치니의 요청에 따라 바르샤바에서의 ‘제비’(La Rondini) 초연에 출연하였다.
이듬해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팔레르모, 나폴리, 로마, 리보르노 등 전국의 유명오페라극장의 초청을 받아 공연하였다. 특히 베니스에서는 만투아 공작(리골레토)과 돈 호세(카르멘)를 맡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베니스의 라 훼니체(La Fenice)에서의 카르멘 공연때에는 공연이 끝난후 무대에서 인사를 마치고 분장실로 사라진 후에도 20분 동안이나 박수가 계속되어 어쩔수 없이 다시 커튼을 열고 무대에 나와 답례를 하기를 무려 16번이나 하였다. 그 다음날, 어떤 신문기자가 플레타에게 ‘어떻게 그렇게 열심을 다하여 돈 호세를 부를 수 있었는가?’라고 묻자 플레타는 ‘저는요, 어제 저녁에 미구엘 플레타가 아니었고 돈 호세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해인 1922년 1월, 그는 로마의 코스탄치(Costanzi)극장에서 찬도나이의 ‘리미니의 프란치스카’에 다시 등장하였다. 대성공이었다. 마침 작곡가 찬도나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찬도나이는 플레타에게 자기의 다음 오페라인 ‘줄리에타와 로메오’(Giulietta e Romeo)에서 로메오를 맡아 줄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달인 2월, 찬도나이의 ‘줄리에타와 로메오’는 코스탄치극장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세계초연을 가졌다. 플레타의 인기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이어 라 스칼라에서 대망의 초청장이 플레타에게 정중하게 도착하였다. 플레타는 이탈리아에서 계속 활동할 것을 다짐하고 스페인 국적 대신에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밀라노에서의 본격적인 시즌 활동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마드리드에 돌아와 테아트로 레알에서 돈 호세를 공연하였다. 관중들의 환호는 공연이 끝난후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플레타는 돈 호세라는 인물을 통하여 자기가 스페인 사람인 것을 확연히 깨닫고 애국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른바 에스파뇰리스모(Españolismo)였다. 당시 에스파뇰리스모는 중남미의 히스파닉(Hispanic)국가들 사이에서 널리 전파되고 있던 운동이었다. 마치 유태인들의 시온주의와 비슷한 운동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귀화하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다만 활동만 하기로 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밀라노와 제노아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남미 순회공연의 장도에 올랐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코르도바, 로자리오, 산 파울로, 몬테비데오, 리오 데 자네이로 등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특히 그는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는 현지 작곡가의 오페라 초연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찬사를 받았다. 플레타는 몇장의 음반을 남겨 놓았다. 그중에서 칠레 작곡가 오스만 페레즈 프레이레(Osman Perez Freire)가 작곡한 Ay, Ay, Ay는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이었다. 당시 축음기가 있는 집이라면 거의 모두 이 음반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의 레코딩중 돈 호세의 ‘꽃 노래’, 그리고 찬도나니의 ‘줄리에타와 로메오’중 마지막 장면은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레코딩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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